만두 다섯 개를 모두 받지 못한 이후의 세계
아이는 태어나서 세 살까지 평생의 효도를 다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 살까지의 아이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그 이후부터는 똥오줌을 가리고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며 무조건적인 보호의 시기를 지나 자기 앞가림을 시작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세 살까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살의 나이인 첫 아이를 사고로 잃은 화자의 엄마는 남겨진 아이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고 싶으면서도 먼저 보낸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상실을 함께 짊어지고 살아갔을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교도소와 성당 봉사를 다니며 바쁘게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은 책임감이자 애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화자가 자라난 환경은 바로 그 틈새에 놓여 있다. 극단적으로 결핍된 환경도, 충분히 보호받은 환경도 아닌 곳. 정서적으로 완전히 비어있지는 않지만 아이의 감정을 충분히 받아 안아주기에는 늘 어딘가 부족했던 가정. 다시 말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실패하지도 않는 양육 환경'이 이야기의 토양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흔한 결핍 서사처럼 부모를 고발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그 환경 안에서 스스로 균형을 만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화자의 낙천성도 미화되지 않는다. 화자의 낙천성은 하이디처럼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음에도 세계를 긍정하는 선천적인 기질이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느낀 정서적 공백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길러낸 후천적인 조절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신파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결핍이 치명적인 상처로만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완전함을 단죄하는 대신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정서적 여백을 화자가 어떻게 메워 왔는지를 보여준다. 완벽한 보호 속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한 아이가 아니라, 불완전한 환경 안에서도 아이가 감당할 수 있었던 범위의 안정감. 실제로 많은 아이들은 완벽히 이상적이도 않고, 그렇다고 아이를 붕괴시킬 만큼 취약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화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최소한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 좌절을 완충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정서를 조율하는 법을 배운다. 화자의 낙천성은 그 조율의 결과이다.
삶을 대하는 화자의 시각 덕분에 이 책은 지나치게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유쾌하게 읽힌다. 상처를 극복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가 과잉이 되지 않도록, 생각이 사념으로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절해 온 아이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보호 속에서도 화자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누군가의 이상적인 돌봄이 아니라, 자신의 조절 능력을 통해 켜켜이 쌓아 올린 단단한 토양 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한 명의 어른이 아니다. 세 살의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을 안고 넘치는 사랑을 온전히 쏟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하고 교도소로 성당으로 봉사를 다니던 엄마에게 아이는 묻는다
"엄마, 지금 여기 만두 다섯 개 있어. 그러면 나한테 몇 개 줄거야? 다른 사람들한테 몇 개 주고, 아빠랑 오빠한테 몇 개 주고 나한테는 몇 개 줄 거냐고?"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아이의 간절함... 원하는 대상으로부터 독점적인 애착을 충분히 받지는 못했지만, 아이는 그 불충분한 사랑을 조부모에게 조금, 오빠에게 조금, 아빠에게 조금, 이웃들로부터 조금,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받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금, 그리고 덧셈을 함수로 풀어 리포트를 쓰는 애인으로부터 채워넣는다.
그때 다섯 개를 모두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는 오히려 사랑이 나뉘고 이동하는 방식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에게 전부를 받지 못한 대신, 여러 사람에게 더해진 사랑.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오천만 개의 만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사람으로 자라난 것이 아닐까?
결핍을 부정하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자리를 스스로 조절하며 살아온 시간의 산물로 얻은 낙천성. 이 낙천성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 선택될 수도 있다. 낯선 사람에게 뜬금없이 fucking whore이라는 욕을 듣기도 하고, 관객에게 처녀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화가 난 상태에서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낯선 할아버지가 실은 씩씩한 자신을 향해 “사람이! 씩씩혀!” 하고 응원의 말을 한 것임을 알고 곧바로 헤벌쭉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 아이 시절에는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가 된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화자는 자신의 과거를 불행했기 때문에 강해졌다는 식으로 정리하지 않는 대신, 그때의 자신이 감당할 수 있었던 만큼만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인정한다.
사랑을 독점하지 못했던 아이는 대신 관계를 확장하는 법을 배웠고,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막연하고 의미심장한 목표보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수롭지 않고 소소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자신의 몫을 정확히 요구하지 못했던 경험은, 타인의 몫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진 넉넉한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이 소설은 상처를 극복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가 삶을 제한하지 않도록 재배치한 이야기이다. 만두 다섯 개를 모두 받지 못했던 아이가 결국 훨씬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 이 소설의 유쾌함은 바로 그 조용한 전환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