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안녕…하세요?

by 솔솔




안녕…하세요? 저는 디자이너입니다. 디자이너라는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달리 작은 디자인 회사에서 없어도 무탈한 것들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회사도 저도 세상에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고 있지요. 반대로 업계 중심에서 늘 새로운 이슈를 만드는 회사도 있습니다. 흐름을 간파하고 만들어 내는 디자이너도 있습니다. 그들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 속을 날아다닙니다. 여기저기 반짝이는 활약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럴 때 저는 그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 저 사람 저거 할 때 나 뭐 했냐.


그들은 저와 제 옆자리 디자이너를 비롯한 평범한 디자이너들과 다른 차원에 있는 듯 합니다. 그렇게 빛나는 그들과 달리 작은 조직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보통의 무명이들은 세상은 커녕 회사 내에서 조차 야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응당 이 일을 좋아해서 시작한 열정가였을텐데도 말이죠. 다들 착실히 제 몫을 하는데도 늘 주눅 들어있습니다. 이건 기분 탓일까요. 문득 그 많던 대학 동기들은 어디서 뭐하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변두리에 있어서일지도 모르지만 필드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없습니다. 혹시 다들 디자인을 때려친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혹여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중 반 아니면 반의 반 정도는 이 일을 하고 있을텐데 감감무소식입니다. 아마도 저처럼 변방에서 디자인을 이어가고 있겠지요. 쥐죽은 듯 조용히 말이죠.


왜일까요. 밖을 둘러보면 다들 이름있고 유망한 회사에 취업해야한다고 합니다. 아니면 퇴사 후 멋지게 독립을 해내는 삶을 말합니다. 이상하죠. 대다수가 그 외 선택지,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실제로 그 수가 제일 많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그 다수는 조용합니다. 저도 그렇고 왜 그리도 숨어지내는지 의문입니다. 다들 인어공주처럼 디자인 왕자님을 만나려다가 목소리를 잃어버린 걸까요. 그 의문을 시작으로 이모저모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마이크들고 말하는 꼴이더라도요.


디자이너뿐 아니라 작은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은 조용합니다. 작은 조직은 세상 풍파에 날아가지 않는데 힘을 다 소진해버립니다. 생존과 현상유지가 목표인 경우가 많죠. 세상은 그들이 없는 것처럼 혹은 중요하지 않은 듯 굽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힘이 남아있지 않아 시름에 가까운 소리만 낼 수 밖에 없습니다. 너무 힘들다, 도망쳐!와 같이 뭉뚱그려진 다소 부정적인 목소리. 결국 아무도 듣지 않아 소리는 이내 끊깁니다.


대단한 성공담이 아닌 평범하게 지고 이기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걸까요. 작은 조직에서 몇년을 보내면서 좀 더 다양하고 세세한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다면 어떻게 힘든지 정말 힘들기만 한지, 도망쳐야한다면 왜 도망쳐야하는지 또 어디로 도망칠 수 있는 지를요. 입사 초기, ‘도망쳐!’와 같은 말을 들었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기에는 배경지식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계속 다녀야 할 이유와 그만두어야 할 이유를 견주어가며 회사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다양한 레퍼런스가 있었다면 퇴사를 했을 수도 있고 다른 자세로 다녔을 것도 같습니다.


모두가 처우좋고 전도유망한 회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유명해 질 수도 없습니다. 도망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도망쳐!’가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슬픈 말입니다. 저에게는 ‘중소기업에 들어가다니, 거기서 커리어를 쌓다니… 너는 이미 끝났어, 너는 이제 이러나저러나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일단 제가 살아야겠어서 그 말에 대항했습니다. 여기도 다 사람이 살고 길이 있다 믿었고 좋은 점들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붙잡으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에 재미가 붙었고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요. 힘들고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분명 많았지만 좋았던 날들도 그에 견주게 많았습니다. 그랬으니 5년을 내리 달렸겠지요.


이곳에 부조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부조리 덩어리였죠. 매일 매일이 모든 대화와 의사결정이 저에게는 부조리로 다가왔습니다. 이 세상이 부조리니까요. 더군다나 작은 조직은 사회적 입지가 낮고 그 작은 조직에서 내 입지도 낮은 편이니 내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부조리가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다. 부조리는 비합리적입니다. 비합리는 대놓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얼굴을 하고 나타가죠. 저는 자주 속고 속였습니다. 부조리의 온상이라니. 역시 도망치라는 건가 싶어지지요. 답은 저도 모릅니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겁니다. 도망치기로 했으면 도망치고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면 싸워보라, 이런 당연한 말이요. 저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고 매일 싸웠습니다. 작은 조직에 소속되어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생존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선택을 하고 그 구간을 지난 사람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고, 비슷한 싸움을 앞둔 사람에게는 조금이라도 참고할 수 있는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키보드 자판을 두들겨 말을 골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