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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시대의 멸망

아무도 글을 안 읽는 시대. 어떤 텍스트가 살아남을까?

by 고독한 사색가

현재 우린 텍스트 시대의 끝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텍스트를 읽지 않는다. 이 글을 클릭한 사람들도 대부분 끝까지 읽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건 내 글이 딱히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텍스트라는 매체가 더 이상 매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세상은 텍스트 시대였다. 사람들은 심심하면 책을 읽었다. 지하철 정류소와 고속도로 휴게소에선 작은 책을 팔았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매체는 신문이었다. 사람들은 편지를 써서 주고받았다. 일기와 비망록을 쓰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근래 텍스트 시대가 급격히 저물고 있다.


텍스트 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인류는 문자를 발명했다. 이는 혁명이었다. 인류는 역사를 기록했다. 기술을 기록했다. 농사짓는 법이 퍼졌다. 농기구 만드는 법이 퍼졌다. 마을이 커지고 국가가 생겼다. 문자가 있었기에 세금을 체계적으로 징수하고 관리했다. 구전되던 이야기도 문자로 남겼다. 그 중 신비한 이야기들은 종교가 되었다. 종교를 중심으로 인류는 뭉쳤다. 작은 도시국가를 넘어선 제국을 만들었다.


종교 시대를 거쳐 인본주의가 꽃피는 시대가 도래했다. 바야흐로 텍스트 시대가 왔다. 인류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탐구했다. 역사를 기록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를 모두 텍스트로 만들어 공유했다.



첫 번째 공격, 시청각 매체의 등장

텍스트 왕국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시청각 매체였다. 백여년 전 등장한 라디오, 수십 년 전 등장한 TV가 차례대로 크게 위협이 되었다. 하지만 왕국은 여전히 견고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 유튜브라는 매체가 등장한다. 유튜브 등장 이후 텍스트 왕국은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류는 텍스트를 독해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건 우리에게 머리 아픈 일이다. 우리 본성과 맞지 않기에 전두엽의 뇌세포를 가동해야 한다. 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으로서 정보를 얻는 행위는 수백만 년 동안 해왔다. 이는 우리의 본성 일부가 되었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아도 대화에 지장이 없는 이유다.


사람들은 머리 아프게 텍스트를 해석하기보단 편안하게 보고 듣는 유튜브로 옮겨갔다. 수요가 몰리는 곳에 돈이 몰리는 법이다. 텍스트 공급자들도 모두 절필하고 유튜브로 몰려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신문을 읽지 않는다. 책도 읽지 않는다. 블로그 글도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같이 보수적인 사람들은 텍스트 왕국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남들이 모두 텍스트를 읽지 않자 오히려 텍스트를 더 열심히 읽고 있다. 근데 더 강한 놈이 등장했고 나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텍스트 왕국이 정말 무너지려 하고 있다.



두 번째 공격, 인공지능의 등장

유튜브의 공격으로 비실대던 텍스트 왕국에 최후의 일격을 날릴 더 강한 놈이 등장했다. 인공지능이란 놈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주제를 정하고, 정보를 취합하고, 구조를 짜고, 살을 붙이고, 덜어내고, 퇴고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적게는 5시간, 길게는 며칠동안 꼬박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쓴다고 해서 그다지 좋은 글이 나오지도 않는다.

근데 인공지능이란 녀석은 이걸 10초 안에 해버린다. 심지어 깔끔하다. 어떤 방식의 글과 구조가 인간들에게 선호되는지를 딥러닝으로 분석했다. 그래서 나같은 초보 글쟁이보다 타율이 훨씬 높다. 모든 분야에 석사급 전문지식을 갖추고 순식간에 글을 써내는 글쟁이가 등장한 셈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작가는 없었다. 그럼 텍스트의 부흥이 와야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오히려 텍스트의 종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은 더이상 '진짜' 글을 쓰지 않는다. 인공지능에게 글 주제를 던지고 개요를 짜도록 시킨다. 그 개요에 따라 예시 글을 작성시킨다. 사람이 하는 일은 거기서 말투만 조금 바꿔 약간 인간적 냄새를 더하는것 뿐이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기계 냄새를 빼고 인간 냄새를 더하는 작업까지 순식간에 끝낼것이다. 그럼 사람은 뭘 하는가? 인공지능에게 주제를 던지고 자기 글인 양 업로드 하는게 그들이 하는 전부가 될 테다.

모두가 이를 알기에 더이상 글에 대한 수요는 없어진다. 내가 직접 인공지능과 대화하면 되는걸 무엇 때문에 남이 복사해놓은 글을 읽는단 말인가. 수요가 사라진 시장에는 공급도 사라진다. 텍스트 왕국의 종말이 눈앞이다.



살아남는건 사람이다

이런 악조건에도 텍스트 왕국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일부는 끝까지 살아남으리라. 여기서 살아남는 건 정보가 아닌 사람이다.


인공지능이 쓴 글은 객관적이다. 편견과 오류가 없다. 하지만 이야기도 없다.


사람에겐 살아온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경험한 강렬한 일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한다. 이 장기기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팔십 먹은 할아버지도 어렸을 적 고향 이야기,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하듯 말이다.


장기기억은 조금씩 오염된다. 이 오염 덕에 힘들었던 과거는 미화되어 추억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오랫동안 때묻은 인간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정보를 재밌게 전달하는 보고서 류의 글은 이제 설 자리를 잃을거다. 아니, 이미 잃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유익하게 읽은 정보글 상당수는 인공지능이 쓴 글일지도 모른다.


살아남는건 사람이다. 흠 많고 주관적이고 편견 가득한, 부족한 존재로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그것이 멸망한 텍스트 왕국 속 최후의 성채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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