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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리뷰

유리창 넘어 서로를 바라보지만 소통할 수 없는 사회, 관계

어느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솔직하지 않았다. 나데르도 라지에도 거짓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말은 합당한 것이고,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이기적인 거짓말이기도 했지만, 그 이기심은 자기 이전에 가족과 생활, 관계 등이 얽힌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비극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을 초래한 것은 무엇일까? 각자의 필요 일 것이다. 그 필요는 어디서 왔을까? 개인이라고 한정시키기에는 너무도 사회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온다. 계급 간에 갈등, 이란 내 젠더 간의 갈등. 나데르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이다. 나데르는 은행가이고 씨민은 이란 내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나름 배운 여성이다. 그에 비에서 라지에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이다. 가정부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남편은 빚에 시달린다. 가난에서 초래한 이들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계급을 상기 시킨다. 라지에의 남편이 합의를  논하는 이유는 자존심이나 정의가 아니다. 그저 생존이다. 라지에는 아이를 맡길 대상이 없어서 아이를 일터에 데리고 오지만 나데르는 딸에게 가정교사를 붙일 정도이다. 그 광경을 보고도 계급을 논할 수 없다면. 가정교사, 이웃 주민 결국 주거와 교육이라는 현대사회의 핵심적 계급 구조 안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증인의 주체들도 본인들이 인지한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관계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나데르에게 유리한 증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법의 체계 안에서 진실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무의식적인 계급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리는 나데르는 법에 대한 지식, 법을 동원할 수 있는 힘에서 라지에에게 압도적이다. 법은 진실을 대변하는게 아니라 결국 계급인 것이다. 나데르의 태도와 라지에 가족의 태도도 그 자체로 계급적이다. 중산층의 교육 받은 나데르의 집안은 판사에게 변호할 때도 이성적이다. 하지만 라지에의 남편과 라지에는 그다지 이성적이지 못하다. 종교에 매달리고 쉽게 감정을 들어낸다. 이란이라는 신정 국가이지만 나데르에게는 그다지 신앙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전에 돈, 이성, 법과 같은 체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한 라지에에게 이성은 한 걸음 뒤에 있는 존재가 된다. 젠더 문제도 필연적으로 작동되는 원리이다. 라지에가 사고가 나게 된 원인, 남편에게 이 일을 숨긴 결정적인 이유는 이란 사회 내 젠더의 문제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버린 이란 사회에서 라지에는 남편의 행동에 종속적으로 존재한다. 나데르는 비교적 서구적인 교육을 받고 딸의 교육을 중시하는 모습에서 이란 남성 치고는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씨민의 의견 이전에 자신의 의견을 앞장 세우는 결국 전통적 젠더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진실했다. 나데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라지에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각자 숭고함을 추구했다. 라지에는 임신한 몸으로 나데르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차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누구의 숭고함이나 진실됨은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사회의 거대한 장벽은 그 것을 별 달리 필요하지 않은 것 쯤으로 치부한다.그 것이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순간을 놓쳐버린 그들의 진실에 남은 것은 계급, 젠더 문제가 만든 비극 뿐이다. 결국 서로 친하게 놀던 두 아이는 서로를 노려볼 뿐이다. 테르메의 선택은 나오지 않는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선택의 마무리는 없다. 선택의 순간만 있다. 진실도 정의도 숭고함도 마찬가지다. 없을 수도 있다. 그저 판단만 해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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