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분석. 우리의 방관 시스템에 대한 분석.
‘프로파간다’라는 단어는 원래 가톨릭에서 하던 포교 행위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그러한 단어가 어느 순간, 특히나 제 1,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는 정치적인 선전, 선동의 의미가 강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전, 선동의 가장 좋은 예시는 모두가 알다시피 독일의 나치 정권이다. 그들은 선전, 선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 선전, 선동을 통해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바이마르 헌법의 토대 아래서 가장 독재적인 정권인 나치정권을 국민의 동의 하에서 탄생시켰다. 선동, 선전의 테두리 안에서 권력은 가장 미시적으로 작동 되고 자발적인 순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보면, 사회지도층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오른다. 망나니 같은 재벌 2세들이 온갖 난리를 치고, 부패한 언론은 세상을 더럽힌다. 세상 모든 문제는 자기 잇속만 챙기고 있는 부도덕한 사회 지도층의 탓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소신 있는 경찰, 검사, 언론인 등은 정의를 위해 노력하지만 좌절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제는 해결되고, 그 문제를 만들던 사회지도층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6개월을 받을지라도 재판장에 끌려 간다. 대중은 그러한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보스턴 가톨릭 교구회 아동 성추행 사건을 다룬 <스포트라이트>는 지극히 건조한 영화이다. 분노하고 폭발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건이지만, 지극히 냉철함을 유지한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연기력이 부족해서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렇게 의도 했을 뿐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냉철하게 하나 하나 깊게 취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배우가 아니라 배경이다. 보스턴이라는 배경이 가장 중요한 주연이 되고 연기를 보여준다. 보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보수적인 동네이다. 가장 가톨릭의 세가 힘이 미국에서 크며, 가장 견고한 사회 공동체를 보여주는 지역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서 성추행 사건이 가장 들어나지 않는 이유는 이 견고한 시스템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이 무너질 우려 그 것들이 침묵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침묵 속에서 사건은 커지지만 아무도 신경 쓰고 않고, 결국 커지지 않는다.
이러한 시스템의 균형은 외부에서 온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포르투갈인. 하지만 시스템은 그들의 외부의 노력의 흔들리기만 할 뿐이다. 결국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내부인들 뿐이다.
내부인(보스턴)의 사람들은 그들의 미시화된, 내면화된 권력 속에서 스스로를 순응에 맡긴다. 영화의 풀샷들은 그러한 내면화된 권력을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풀샷을 잡을 때 자주 보이는 건물이 있다. 바로 교회이다. 어디에서 잘 보이는 교회는 권력의 감시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내면화된 권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제에 대한 순응과 자기 검열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스턴 글로브 앞에 있던 광고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AOL Everywhere.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것은 AOL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화된 권력, 시스템에 순응하는 자세 속에서 존재하는 그 것을 보여준다.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다면 권력을 변할 수 있을까? 아마도 영화 속에 대사처럼 단지 썩은 사과 처지 하는 수준 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월터는 시스템을 건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기다리라고. 추기경을 공격하더라도 그 추기경에 자리에 다른 부패한 권력이 자리 잡을 것이다. 시스템, 우리 내면화된 미시권력이 변화지 않은 상태라면 말이다. 하지만 미시화된 권력은 사라지기 쉽지 않음을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기사를 언제 내보낼지 고민하는 회의실 장면 그 벽면에서 보이는 것은 바티칸 시국의 전경 사진이다. 그들이 바티칸,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 기사에 대한 논의 하는 그 순간, 그 공간에도 그들은 존재하는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영화의 중간에 911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에서 전체주의가 가장 내면화되는 시기의 시작이 되는 사건이 영화 중간에 있다니, 아니 사건 중간에 있다니 흥미롭다.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Lonely하고 Holy한 크리스마스는 존재할 지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과연 진실로 저 감정을 담을지는 모른다. 그저 어른들이 권력들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하는 걸지도 모르니.
영화 속에서 한국의 영화, 드라마에서 나오는 외압의 장면은 대놓고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기자들 같이 그렇게 기자 정신이 투철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으로 나온다. 그들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랬다. 과거에도 그랬던 그들이지만 그들은 과거에 이 징조들을 찾지 못했다. 아니 무시했다. 그들이 정의롭지 못해서 일까? 아니다. 단지 정의만으로 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정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정의롭지 못한 시스템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눈을 감고, 외면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대사처럼 ‘한 아이를 기를 때, 한 마을이 필요하지만, 한 아이를 죽일 때도 마찬가지로 한 마을이 필요한 것’처런 말이다. 우리는 외면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외면하게 만들어진다. 시스템에 의해서. 그 시스템을 흔드는 것은 외부의 시선일 수 있지만 결국, 변화하기 위해서는 내면이 움직여야 한다. 영화의 끝은 어찌 보면 허망하다. 한국의 영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 같이 그들이 재판장으로 끌러가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피해전화와 허망한 듯한 주인공들의 표정, 그리고 롱쇼트. 음악은 음산하면, 자막으로 나오는 사건의 후일담은 오히려 더 비극적이다. 그들은 열심히 뛰었지만 시스템은 변화지 않았고 결국 변한 건 없었다. 정의로운 생각, 기자 정신 그런 것들은 패배 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다만, 권력에 눈감고, 순응하면, 그 권력을 내면화 시킨 우리가 패배한 것이다. 각자 개인들이 눈을 감고 시스템을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소위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