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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Dec 17. 2021

결혼은 왜 증오의 대상인가

1.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는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근간이라고 믿고 있는 투표권에도 여러 제한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 출마 가능 나이는 만 40세이고 국회의원 피선거권도 만 25세 이상이다. 작년 총선부터 만 18세 이상이면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만 19세부터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일종의 제한이다. 이런 제한이 생기는 이유는 그런 제한을 가하지 않을 경우 미성숙한 자들이 잘못된 판단으로 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고 믿기기 때문이다. 


투표권 제한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탄생부터 자신을 성숙한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어서 새삼스럽지는 않다. 고대 아테네는 물론 근대에도 여성은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투표에서 배제하였고, 유색인종도 비슷한 이유로 투표권을 얻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어떤 행위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제한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하기에 적합한 '자격'을 지닌 누군가가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 '자격'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군인이 되려면 어떤 자격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 또 어떤 자격을 지닌 자가 철학자가 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이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인간을 '젊은이'와 '노인', 그리고 '한창때'의 세 부류로 구분한 것은 그런 자격이 누구에게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이를 "변덕이 심하고 금세 싫증을 내며 (...) 성급하고 충동에 휘둘린다. (...) 아직은 잘 속지 않은 까닭에 남의 말을 곧이듣는다"(수사학/시학, 2017, 172~173)라고 평가했다. 반면 노인은 "의견만 많을 뿐 확실히 알지는 못하며 (...) 불신하므로 의심하고, 경험 때문에 불신한다. (...) 지나치게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위해 살고, 고매한 것을 위해 살지 않는다"(같은 책, 175~176)라고 평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양극단 사이에 둘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한창때'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정신적으로는 49세가 그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성숙한 판단력을 지닌 40대만, 약간 유통성을 발휘하여 30~50대만 투표권을 갖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성급하고 충동에 휘둘리는 젊은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노인에게 투표권을 주면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나이가 40대이더라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중졸 이하의 사람들에게도 투표권을 주면 안 될 것 같다. 그들 역시 배움이 크지 않기에 남에게 휘둘리거나 거짓에 빠져 잘못된 투표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 숙고해 보니 가난한 사람들도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가난한 이들은 대체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니 지식이 부족해 판단력이 좋을 수 없고, 그러니 이들도 투표에서 배제하는 게 '올바른 민주주의'의 추구를 위해 좋을 것만 같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평등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권력과 평등한 위치로 올라서면 그 즉시 또 다른 불평등을 일으킨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평등, 그리고 정치는 오직 자신의 위치에만 관심을 두는 속성이 있다. 즉 현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집단과 평등한 위치로 올라서길 요구하는 집단은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집단과는 경계선을 그으며 그들을 평등의 속성에서 배제하는 역설을 일으킨다. 오늘날 남성의 권력을 요구하는 여성의 요구는 그보다 약한 지위의 소수자들(다문화, 퀴어, 인종 등)에게, 정규직의 권력을 요구하는 계약직 근로자는 일용직 근로자에게, 가정 내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어린 자녀에게 자신과 평등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제한'을 부여한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에도 복잡한 균열이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가정주부 역할을 하는 남성, 출산 등의 사유로 비정규직이 된 정규직, 자신을 꾸미고 애교를 피워 남성을 사로잡는 예쁘장한 여성 아이돌을 바라보는 눈은 비록 같은 주부, 같은 비정규직, 같은 여성의 입장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평등에 관한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달라짐을 보여 준다. 이것은 평등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의 '정치 행위'가 결코 '순수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2.

이 대목에서 나는 랑시에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지배자에게 지배의 '자격'을 부여해 주는 일곱 가지 아르케(arche. 근본, 원리)를 정의한 바 있는데, 랑시에르는 마지막 일곱 번째 아르케에 주목했다. 그 일곱 번째 아르케는 제비뽑기라는 '신의 선택'이었다. 투표도 아닌 제비뽑기가 어떻게 지배자에게 자격을 부여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누가 뽑혀도 상관없을 정도로 완전히 평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생각에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에서 민주주의를 두고 "우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기초하는 통치 원리"(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2011, 96)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민주주의는 '데모스*의 지배'라는 뜻 말고 다른 결격사유나 제한이 없다. 


자크 랑시에르


그런데 오늘날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는 체제는 투표권에 제한을 둔다. 평등할 수 있는 권리에도 그런 권리를 받을 만한 자격을 둔다. 이처럼 투표권이나 정치 참여, 공직을 나이 등으로 제한하는 것은 데모스가 주인이 되는 것을 막는다. 지능이 떨어지거나 판단력이 흐리므로 투표권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결국 현재 우위에 있는 자들과 전문가 집단이 현재의 지배력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을 욕구를 드러낸다. 이것은 플라톤이 일곱 번째 아르케인 민주주의의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다며 내세웠던 엘리트주의, 철인정치에 훨씬 더 가깝다. 플라톤은 모두를 똑같이 평등한 존재로 간주한 뒤 '모두에게, 아무에게나' 지배의 권한을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았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은 민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모, 연장자, 주인, 귀족, 강자, 아는 자가 자녀, 연소자, 하인, 평민, 약자, 모르는 자를 지배하는 원리에 자격을 부여했다. 그렇게 자격이 있는 자가 통치를 해야 어리석은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플라톤은 지배의 원리를 밝힐 수 없는 일곱 번째 아르케, '원리가 없는 아르케'인 민주주의의 반대자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플라톤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우리가 민주주의를 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라고 믿으면서도 '아무나' 통치를 할 수 있다는 원리에는 제한을 두고자 한다. 


랑시에르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하고 있다고 본다. 투표권의 나이 제한 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투표권의 나이 제한 문제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논의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으며 한쪽을 선택하도록 의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행위는 자유주의의 일이다. 새뮤얼 체임버스는 <랑시에르의 교훈>에서 랑시에르의 말을 다음처럼 인용한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투표권의 연령 제한을 정당화하는) 이 모든 하나하나의 주장은 불평등과 우위, 전문가들을 옹호하는 주장이자, 나이라는 잣대로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 민주주의는 지능의 평등에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위의 원리(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불평등의 가정)에 관여하는 한, 우리는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랑시에르의 교훈, 2019, 51) 


결과적으로 그는 "그러한 연령 제한에 어떠한 민주주의적 근거도 없다"(같은 책, 52)라고 말한다.


투표권에 나이 제한을 이유로 지능이나 연륜의 문제를 드는 것은 여성이 지능이 떨어지거나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치에서 배제했던 오래전의 논리와 같다. 이들은 과거에 '몫이 없는 자들'이었으나 뛰어들어 자신들의 몫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몫이 없는 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무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랑시에르와 그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 '치안**'이 아닌 '정치'가 나타난다. 여기서 그 순간이란 평등과 불평등이 갈등을 일으킬 때이다. 


그런데 정치의 결과로 몫이 없는 자에게 몫이 돌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예를 들어 투표권이 없던 자들이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불화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는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진다. 우리가 평등해졌다고 믿었던 것 사이에서 평등하지 않은 무수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서 결코 순수할 수 없는 정치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봉합된 듯한 평등과 불평등의 갈등은 임금 격차나 사회 진출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의 평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형태로 분열한다. "평등이 사회적 혹은 국가적 조직 안에서 자리를 얻으려는 순간, 평등은 자신의 대립물로 변화"(같은 책, 87)하는 것이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우리가 정치라고 이해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저 치안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평등이 하나의 체제로 올라서는 순간 평등은 스스로 평등을 거부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랑시에르가 정치는 절대 순수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고 주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이것을 평등의 요구가 결국 개인이나 단체의 이기심에 기반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는 평등의 의미로 볼 때 역설적으로 들린다. 결국 완전한 평등이란 유토피아는 있을 수가 없다.



3.

난 이제 이러한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오늘날 가정 내에서 요구되고 있는 집안일의 평등, 육아의 평등, 결혼 비용의 평등, 벌이의 평등과 같은 온갖 평등에 관한 요구가 왜 평등 자체의 그 고귀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가정 내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네가 어떠한 사람이던지'라는 의미의 '아무나'가 아니라,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이란 의미의 '자격'을 요구한다. 서로 간의 동등한 자격, 우리는 그것을 '사랑받을 자격'이라 부른다. 나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자유와 사랑을 혼동하고 있다고 본다. 자격의 논의는 사랑이 아니라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 사랑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인간, 동등한 존재, 즉 평등한 위치로 인식할 때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나타나는 사랑은 상대방에게 어떤 자격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상대방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이는 우리가 결혼을 할 때 상대방을 존재 그 자체만으로 평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외모, 나이, 재산, 지식, 육체적 힘 등과 같은 '지배' 원리를 토대로 바라보고 있음을 뜻한다. 이 지배 원리는 결혼 지참금, 가정 내 노동 시간, 여가 시간, 돈의 사용 등을 두고 끊임없이 힘싸움을 벌인다. 이는 사랑의 의미를 생각할 때 역설적으로 들린다. 


평등하지 않다는 한쪽의 목소리가 승리를 거두어 배우자와 평등한 위치로 올라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 쟁취는 곧 또 다른 불화로 이어지는데, 이제 얼마 전에 '패배'했던 쪽이 '승자'와 똑같은 원리를 내세우며 자신이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자격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자격을 요구했던 자는 머지않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자격을 요구받게 된다. 이렇듯 사랑이 가정 내에서 자리를 얻으려는 순간, 사랑은 자신의 대립물로 변화한다. 사랑은 절대 순수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저 계산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적지 않은 가정에서 평등과 불평등이 마주치는 정치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몫이 없는 자가 보여주는 가정 내에서의 무기력함 혹은 몫이 없는 자가 몫을 요구하면서 나타나는 정치 행위의 갈등을 보며 자라났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결혼에 부정적인 관념을 갖게 된 것은 그렇게 수없이 반복되는 정치 행위와 '사랑의 자격'이라는 형용모순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와 평등을 논하며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를 말할 때 나는 그를 본떠 '결혼은 왜 증오의 대상인가'를 묻는다.




* demos. 인민. 랑시에르는 '통치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민들을 강조하고자 데모스를 사용한다. 인민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를 뜻하는 '크라티아Kratia'가 합쳐져 인민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democracy'가 되었다.

** 랑시에르는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정치를 '치안'이라 부른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이란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는 자유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격에 제한을 두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그런 체제 하에서는 정치적인 것이 나타날 수 없다. 그런 체제 하에서는 오직 플라톤 식의 통치 행위, 치안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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