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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Dec 26. 2020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헛점

1.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 농업혁명은 덫이었다."(129쪽) 


이것은 도발적인 문장이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더욱더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보다는 소수의 사람이 더욱 풍요롭게 사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위의 인용문은, 그리고 그가 <사피엔스>에 남긴 수많은 진술은 그렇게 해석된다. 수렵사회의 채집민과 농경사회의 농부들이 보유한 생물학적 생식 능력과 욕구가ㅡ비록 상황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겠으나ㅡ비슷하다고 가정할 때, 농경사회에 들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사실은 상시로 획득할 수 있는 식량의 양과 정착 생활이 주는 안정감이 인구 증가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요소라는 걸 나타낸다. 저자의 지적처럼, 정주 생활을 하느라 지킬 것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내부적인 폭력이 늘어났으며 집단생활로 인해 전염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시로 이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한 번에 많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고, 농경 생활 덕분에 식량 생산량이 증가하여 늘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식의 인구 증가를 덫이라고 판단한다. 농부는 증가한 인구수를 감당하느라 더 많은 땅을 더 오랫동안 경작해야 했고, 결국 더 많은 노동이라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은 고대인의 시대상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의 시대상을 드러낸다. 많은 아이를 낳아서 힘들게 사느니 부부 단둘이서 살거나, 아니면 아주 적은 수의 아이만 낳아 편한 삶을 보내겠다는 심리 말이다. 저자는 후자의 심리가 삶의 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아주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고대 수렵채집민들은 어째서 삶의 질과 인구의 수를 교환하는 악수를 두게 되었을까?

"(농업사회였던) 기원전 8500년 여리고의 평범한 사람은 (수렵 채집사회였던) 기원전 9500년이나 기원전 13000년의 사람에 비해 더욱 힘들게 살았다. (...) 사람들은 왜 이렇게 (농업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했을까?"(133쪽) 


저자는 우선 '삶의 질'을 인생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둔다. 그러고 나서 삶의 질이 떨어지자 고대인들이 '치명적인 계산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이제 나의 의문이다. 그럼 저자는 고대인이 자식을 단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을 기를 수 있게 된 상황을 왜 '개선'과 연결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길러야 하는 아이가 많아져서 한 명을 기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하게 되면 부모는 삶에서 그 나름의 가치와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저자의 관점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아이를 대여섯 명씩 낳았던 가정들에 비슷한 의문을 던진다. 한 명만 낳았으면 충분히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해외여행도 마음껏 다녔을 텐데 그들은 왜 아이를 다섯이나 낳는 '치명적인 계산 오류'를 범한 것일까? 오히려 피임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그 시대에 말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서 비슷한 오류를 발견한다. 젊을 때 돈을 많이 벌어서 35세에 은퇴한 후 그 뒤엔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이 그때가 되면 그동안 자신이 누렸던 물질적 사치를 포기할 수 없어 힘든 삶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볼 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던 무일푼의 시절로 기꺼이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마치 농경사회의 풍부한 밀을 경험하게 된 농부가 가난한 수렵채집민의 삶으로 더는 돌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발 하라리의 관점에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현대의 젊은이, 무엇보다도 먼 과거의 농부가 자신의 노동을 대가로 획득한 것을 거의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현대 문명이 사람들을 여유 있게 살도록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바쁜 삶을 살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느긋하게 편지를 보내도 되었던 시절과 메신저로 바쁘게 채팅을 해야 하는 시대를 비교하며 편지를 쓰던 시대가 지금보다 더 많은 여유를 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얻을 수 있게 된 것, 가령 먼 길을 떠난 남편이 잘 도착했는지 며칠에 걸쳐 조마조마 기다려야 했던 과거보다 바로 연락을 받을 수 있어 마음의 안정을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오늘날의 장점을 외면한다. 저자는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가난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삶의 질에 있어 훨씬 앞선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치품과 자동차가 현대의 젊은이에게 심적 행복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대단찮게 여기는 이유도 같은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가 볼 때 그런 물건들은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고대 피라미드의 재현일 뿐이다. 


"피라미드는 수영장과 늘 푸른 잔디밭이 딸린 교외의 작은 집일 수도 있고, 전망이 끝내주는 고급 맨션 꼭대기 층일 수도 있다. 애초에 우리로 하여금 그 피라미드를 욕망하도록 만든 신화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174~175쪽)


하지만 이런 관점은 역사를 뒤돌아보는 자가 부릴 수 있는 여유일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먼 미래를 내다보며 자신의 삶을 건설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런 능력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가장 쉽게 하는 일 중 하나는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과거의 행복을 평가하는 일은 곡해의 여지가 있다. 그것도 무려 일만 년 전의 고대 수렵 채집인이 자신의 많은 자손을 바라보며 느꼈을 어떠한 감정, 어쩌면 행복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그 감정을 '사기에 빠진 결과물'로 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저자가 '사기'라고 생각하는 농업혁명의 결과물은 고대 수렵 채집사회를 이상적으로 그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고대의 수렵 채집사회는 폭력적인 다른 수렵 채집 집단을 만나더라도 싸우지 않고ㅡ지켜야 할 소유물이 없었으므로ㅡ그냥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특이한 가정으로 보인다. 네안데르탈인과 다수의 대형 동물들을 멸종시킨 것으로 보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수렵채집민들과 조우했을 때 과연 서로를 온건하게 대했을까? 저자는 소유하는 게 없었으므로 욕심부릴 것도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빼앗을, 혹은 빼앗길 만한 충분한 밀과 열매가 없었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는 확실히 있었다. 폭력적인 수렵채집민 집단이 다른 채집민 집단에 아이와 여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을 때, 요구받은 집단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을 것이다. 죽기로 싸우거나, 아니면 그들을 내어주거나. 여자와 아이를 내준 수렵채집민 집단은 서서히 도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선 싸워야 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승리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숫자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건장한 한 명의 사내보다는 허약하더라도 세 명의 사내가 있는 것이 싸움에서 유리했다. 


최근의 연구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역시 같은 동족을 살해한다는 보고를 내놓고 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제3의 침팬지>에서 제인 구달의 연구를 인용하며 침팬지 집단 간의 대규모 학살 사건을 서술한 바 있다. 고릴라와 침팬지 역시 가진 것이 없어서 갈등이 생기면 그냥 떠나면 될 테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유인원들도 그러한데, 유인원뿐만 아니라 같은 종을 대규모로 학살해 온 인간에게서 항상 평화적인 모습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그는 수렵채집민이 농업혁명으로 인구를 불린 농경 부족을 만났을 때 학살당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번식이라고 볼 때, 농업혁명으로 인구를 불리는 것은 다른 악조건을 고려해도 이득임이 분명하다.


즉, 고대 수렵 채집인들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없어서 폭력에서 벗어났고, 농경사회의 농부들은 지켜야 할 수확물이 있어 폭력적이었다는 저자의 가정은 잘못되었다. 잘못된 가정을 했기에 그는 늘어난 인구수를 감당하느라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했던 농부의 삶을 불행했다고,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늘어난 인구수를 보면서 오히려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다음엔 다른 어떤 인간 집단을 만나더라도 쉽게 죽임을 당하거나 여자와 아이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그 안도감에서 오는 행복이 노동의 강도가 주는 고통보다 더 크지는 않았을까? 유발 하라리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2.

저자는 애초에 '소유' 자체를 그다지 좋지 않게 여긴다. 그는 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라는 문구가 탐탁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고대인들이 바라던 더 많은 자손의 욕구는 물론, 농경 사회의 결과물로 획득하게 된 상당한 밀의 소유도 좋지 않게 여긴다. 그는 고대 채집사회 부족들이 갖지 못했던 소유물, 즉 밀이 재앙을 불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밀의 소유가 곧 더 많은 폭력과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도 사건을 오도하는 면이 있다. 우리가 적당히ㅡ적당히라는 구분도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ㅡ소유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않으리라 가정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가정처럼 보인다. 그의 가정에 따르면 고대 수렵 채집인들은 보유하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포기도 빠르고 그래서 덜 폭력적이어야 하는데 전술했듯이 이는 말 그대로 순수한 가정일 뿐이다. 이런 식의 가정이 가능하다면 고대 수렵 채집인들은 농경사회의 농부보다도 더 폭력적이었을 거라 가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오늘날 부랑자들이 급식소 앞에서 배분량을 두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부족한 듯한 혹은 적정한 듯한 소유가 곧 서로 간의 평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애초에 만족의 크기를 일방적으로 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가 이런 식의 불합리에 빠져 있는 이유는 그가 삶의 질을 주관적으로, 특히 불교에 가깝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의 질, 이른바 '행복'의 문제에 불교의 원리를 적용한 뒤 그 방식에 별다른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는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세 명의 자식을 키우느라 등골이 휜 부모의 삶은 자식을 한 명도 두지 않은 채 자신만의 인생을 즐기는 부부의 삶보다 훨씬 불행하다. 소유한 것을 지키려 애쓰는 농부는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는 수렵 채집인보다 훨씬 불행하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진실인지는 자명하지 않다. 아무리 채집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어느 계절에 어느 곳으로 이동하면 무엇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것과,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쫓겨나는 것은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저자는 채집사회의 '포기'를 마땅히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미화한다. 


가난한 자들도 작은 소유물을 서로 갖겠다며 다툰다. 상대성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녀조차 번뇌를 일으키는 씨앗이라 여겨 애초에 결혼하지 않지만, 그것도 불교의 입장일 뿐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통용되어야만 하는 단 하나의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것에 딱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사피엔스>에 설명해둔 것처럼, 수많은 자손 번식에는 성공하였지만 좁은 우리에 갇힌 채 몇 개월을 살다가 도축장으로 팔려나가는 송아지의 인생보다는, 예견할 수 없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자손 번식을 장담할 수 없을지라도 자연의 넓은 대지 위에서 뛰어다니며 사는 송아지가 훨씬 행복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비유를 인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농경 사회 농부의 삶을 강압적으로 가두어진 송아지의 삶과 비교하는 것엔 큰 무리가 따른다. 농경 사회의 농부는 소처럼 일해야 했지만 폐쇄된 공간의 송아지들처럼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농부도 시대의 문화에 길들었을 테고 그에게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가해졌겠지만, 비좁은 우리에서 잠깐 살다가 도축되는 송아지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다. 송아지와 비슷한 삶을 비교하려면 교도소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무고한 재소자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무리 비참했다고 해도 고대 농경사회의 농부가 그런 위치는 아니었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이다. 정도의 차를 무시한 채 사건을 동일 선상에 놓는 순간 동의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가 나타난다.


인간의 삶은 동물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여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교수가 자신의 지적인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여 다른 사람도 그러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혹은 인간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은연중에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삶이 낫다고 했던 이의 주장은 하나의 의견이지, 시대를 넘어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다. 특정 종교의 입장도 그 종교의 관점에서 통용되는 진리일 뿐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어쩌면 고대 농경사회의 농부들은 온종일 일을 해도 배가 고픈, 불타면 곧 없어져 버릴 헛간의 허상에 매달린 얼간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고된 노동을 끝내고 자신이 직접 지은 안전한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이 수확한 밀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느낄 행복을 그 시대판 '피라미드'라 부르게 할 수는 없다. 미래에서 보면 과거는 언제나 얼간이들로 가득했다. 여성을 빼고 자유를 논했던 토머스 제퍼슨도, 사회의 유산을 빼고 평등을 논했던 마르크스도, 노예를 빼고 도덕의 본질을 논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미래의 관점에선 시대의 얼간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시대의 당면 과제에 누구보다도 의문을 품었던 얼간이였다. 그리고 얼간이들도 행복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고대인이, 그리고 우리가 농경 사회의 사기극에 빠졌다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말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쌓아 올리려 했던 호모 사피엔스의 행복론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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