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뜬금없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프랑스에서 석사를 마친 뒤, 삶의 목표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상태였다.
일을 찾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분명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몇 안 되는 내 장점 중 하나였는데, 나도 모르는 새 누적된 스트레스로 수면 장애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이 상황까지 와서야 나는 내가 꽤 지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몸과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닳아있었다. 자존심은 물론 자존감도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다. 그렇기에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완주가 목표는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걸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 수많은 선택지 중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길을 선택했다. 길을 잃지 않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걷고 싶었다.
내 순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다. 멈춰 서 있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가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냉담자이기도 했던 내가 순례를 선택한 이유도, 신앙보다는 어디엔가 기대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톨릭 신자가 된 계기 역시 신념의 결과라기보다 힘든 시기를 통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번 순례의 목적은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사색이었다. 그럼에도 순례길에서 만난 미사는 최대한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믿음이 있어서라기보다 그 시간이 주는 질서와 침묵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특별한 결심 없이 나약한 상태 그대로 순례길에 올랐다. 이 선택에는 신앙이라고 부를 만큼 분명한 믿음보다는, 오래 미뤄두었던 질문들이 더 가까이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