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0 - 파리에서 생장으로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했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훌쩍 떠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20일 넘는 여정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최소한의 준비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과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며 트래킹화와 배낭을 비롯한 필수품들을 하나 둘 구입하다 보니 어느새 처음 생각했던 예산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마음가짐뿐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준비를 하면 할수록, 순례길을 걷기로 한 목적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았다. 마음 한편에서는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맴돌았지만, 이미 출발지인 생장으로 가는 기차표까지 예매해 버린 뒤였다. 때문에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준비를 이어갔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결심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회피가 아닌가 싶다.
순례를 떠나기 위한 물품 준비만큼 중요한 일은, 수많은 순례길 선택지 중 자신이 걸을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여러 루트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언젠가 순례길을 걷게 된다면 포르투갈 해안을 따라 걷는 까미노 포르투게스(포르투갈 길)나 까미노 노르테(북쪽길) 걸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선택한 길은 가장 대중적인 까미노 프랑세스, 프랑스 길이었다. 이 길은 수많은 순례길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루트다. 길을 잃을 확률이 적고, 그만큼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구글맵을 보면서도 엉뚱한 곳으로 가기 일쑤인 나에게 '길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이었다. 비록 중간에 이 길을 끝까지 걷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길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어영부영 준비하다 보니 출발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당시 파리에는 파업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비교적 잠잠해 보여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처럼, 출발 전날 내가 예약해 둔 기차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부러 프랑스 고속열차인 TGV 대신, 최근 운행을 재개한 파리 오스테를리츠역 출발 침대열차 예매했는데, 하필 내가 예약한 그 열차가 취소되어 버렸다. 이런 일이 생가면 괜히 '가지 말라는 뜻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번에 떠나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급하게 같은 날짜에 바욘으로 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처음 예매했던 금액의 세 배를 주고 TGV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불안함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내 욕망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긴 배낭을 짊어지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첫날의 목적지는 프랑스길의 시작점이자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 Pied-de-Port)였다. 순례자 여권을 받고 하룻밤 묵는 것, 일정 자체는 굉장히 단순했지만 이미 여러 일이 있었고, 숙소 예약도 하지 않은 상태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생장은 작은 마을이라 TGV가 정차하지 않는다. 바스크 지방의 도시 바욘에 도착한 후, 지역 열차 TER로 갈아타야 했다. 이동시간만 최소 다섯 시간. 혹시라도 열차를 놓치거나 지연된다면 조금 골치 아파질 여정이었다.
걱정과 달리 열차는 정시에, 화창한 날씨의 바욘에 도착했다. 대신 애용하던 선글라스 다리가 부러져버렸다. 괜히 액땜이라 여기며, 생장으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봉 드 바욘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저렴한 선글라스도 하나 구입했다. 일종의 고춧가루인 피망 데스플레뜨(Piment d'esplette)로 유명한 에스플레뜨 마을도 이 근처이고, 바스크 지방의 요리가 유명한 곳이라 언젠가 다시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생장으로 향하는 기차 시간이 다가와 역으로 돌아가자, 어느새 작은 플랫폼은 커다란 배낭을 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설렘과 조금의 불안이 뒤섞인 표정들. 모두 같은 목적지로 가는구나.
생장의 작은 역에 도착한 뒤, 같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순례자 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줄을 서니 어느새 내 뒤로 긴 행렬이 이어져있었다. 간단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듣고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순례자 여권,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았다. 첫 도장이 찍힌 여권을 받고 나니 비로소 순례가 현실로 다가왔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조금 걸어가니 한 집 앞에 배낭들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공립 알베르게였다. 배낭을 세워두고 잠시 기다리자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서니 계획했던 모든 일정이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숙소 정원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하루 동안 쌓인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이렇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유난히 감사하게 느껴졌다.
사실 처음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때는, 가능한 한 혼자 걷고 싶었다. 누군가와 보조를 맞추기보다 내 속도에 맞춰 걷고, 말을 아끼고, 그동안 외면해 왔던 생각들을 조용히 마주하고 싶었다. 이 길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그래서 걷는 동안만큼은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프랑스 길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 길이 정말 내가 기대하는 대로 나를 나 자신에게 데려다줄 수 있을지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저 첫날의 안도감에 기대어 내일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여정을 위해 배낭을 다시 정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