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 론세스바예스
몇 시쯤 출발해야 할까 고민하던 전날 밤이 무색하게 이른 아침부터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버렸다. 진동으로 맞춰둔 알람 없이 일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아직 이른 기상에 익숙하지 않아 침대에서 잠시 뒤척였다. 전날 대강의 준비는 끝내두었고, 점심으로 먹을 빵을 사기 위해 빵집이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숙소를 나섰다. 숙소 밖은 여전히 깜깜했다. 산간지역 특유의 짙은 안개가 이른 아침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어 마치 안개비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순례길을 걷는 첫날이자, 순례객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날이었다. 괜히 겁부터 났다. 마을을 빠져나와 순례길에 들어가는 짧은 구간이었지만, 아직 길 찾기에 익숙하지 않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다른 순례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온 M씨, 멕시코에서 온 하비에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헉'소리가 절로 나오는 가파른 오르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침 내내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여 있어 사람 그림자조차 잘 보이지 않았는데,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오리손으로 이어지는 급경사를 끙끙거리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하비에르는 저 멀리 뒤처져 있었고 나와 M씨는 앞서가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한국인 순례자 H씨를 만났다. 혼자 걸을 생각으로 출발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동행이 생겨버렸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리손에 도착했다. 산 중턱에는 여전히 안개가 깔려 있었지만, 오리손은 파란 하늘아래 쨍한 아침 햇살을 맞고 있었다.
전날 순례자 사무소에서 들은 주의사항을 떠올리며, 오리손에서 아침 커피도 마시고 물 보충을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리손 이후에도 정상까지 한참 동안 오르막이 이어졌다. 첫날부터 산을 넘어야 하는 루트임에도 프랑스 길이 유독 붐비는 이유는, 힘들다는 생각이 사라질 만큼 환상적인 풍경 덕분이 아닐까. 확실히 고생과 아름다움은 비례하는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새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나들며 한참을 걷다 보니 드디어 내리막이 시작되는 곳에 다다랐다. 준비해 온 과일과 아침에 산 키쉬를 M씨과 H씨와 나눠먹으며 하산하기 전 잠시 휴식을 가졌다. 어느 정도 체력과 근육이 있고, 오랫동안 걷는 것도 무리 없을 거라 자만하며 순례길을 시작했는데, 그건 나의 오만함이었다. 순례길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 사실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산과 달리 고도가 높아질수록 초원이 펼쳐지는 산은, 지상의 그 어느 곳보다 태양과 가까운 느낌이었다. 내리쬐는 햇빛과 강한 바람 속에서 10kg 가까운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우는 하루였다.
등산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조심스럽다. 평소에도 하산할 때 유난히 신경을 쓰는 편인데, 배낭 무게가 더해지니 무릎에 부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곳을 넘으며 자신의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삐그덕 거리기 시작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내 경우에는 그곳이 무릎이었나 보다. 배낭을 메고 걷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과, 우연히 생긴 동행 덕분에 이 힘든 길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뜨거운 오후 햇살 아래에서 걷고 또 걷다 보니, 마침내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도착했다.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쉴 수 있는 공간에 들어섰을 때, 그제야 진짜 안도감과 행복이 밀려왔다. 피레네 산맥 남쪽에 위치한 이 알베르게는 생장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순례자가 묵는 곳이라 규모가 상당히 컸다. 샤워를 하고, 땀에 젖은 옷을 손빨래하고, 스트레칭을 하며 저녁시간까지 기다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순례를 하는 동안만큼은 화면을 넘기지 않고, 나에게 집중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아, 이게 순례자들의 하루구나.
신청해 둔 저녁을 먹으며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순례길 첫날에 대한 감상,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기대와 걱정, 그리고 이런저런 정보들을 나누었다. 혼자여야만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길을 걸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걷는 즐거움을 알게 된 하루였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옆에 앉았던 미국인 아저씨가 순례자 미사를 참석한다고 하여 얼떨결에 순례길의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숙소에 딸린 성당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함께 걷다가 어느새 뒤처졌던 하비에르였다. 잠깐 스쳐간 인연이었지만, 이렇게 다시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 이상하게 반가웠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낯선 미사를 듣고 있으니, 정말 오늘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현실감이 들었다. 미사가 끝난 뒤 순례자들에게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축복을 받자, 비로소 내가 순례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 순례길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가느냐보다, 어떻게 걸어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