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덜거리는 무릎 끝에 고양이는 언제나 옳다

Day.2 - 수비리

by Solynn

이른 새벽부터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 가톨릭 성가가 울려 퍼졌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근처 성당에서 새벽 미사를 드리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이곳에서는 알람보다 성가가 하루를 깨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 성스러운 알람이다. 덕분에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전날 함께 걸었던 M씨는 이곳이 아니라, 30분 정도 더 걸어가야 하는 마을인 아우리츠의 알베르게에서 묵고 있었다. 나와 H씨는 M씨와 합류하기 위해 어두운 길을 나섰다. 피레네 산자락에 위치한 알베르게에서 마을까지는 도로 옆에 난 숲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쌀쌀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헤드랜턴을 가지고 있던 한 순례자를 선두로 모인 여섯 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 불빛에 의지해 깜깜한 숲길을 조용히 걸어갔다. 혼자였다면 아직은 낯선 이 길이 조금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시작하려던 순례길은, 이렇게 다시 사람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온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마을 도입부에 도착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카페는 이른 아침 배고픈 순례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카페를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독특한 도로의 형태 때문이었다. 잘 닦인 도로 양쪽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도로와 건물이 인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물이 흐르는 수로가 그 사이를 분리하고 있었다. 인도라기에는 너무 좁고, 중간중간 끊겨 있는 길은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이 동네가 친숙하게 느껴진 이유는 예전에 살았었던 교토의 한 동네처럼 수로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M씨와 합류를 한 후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어제보다 익숙해진 스틱 사용 덕분에 확실히 부담이 덜해진 느낌이었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동영상으로 사용법을 충분히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실전은 확실히 달랐다. 내리막과 내 삶의 무게에 혹사되고 있는 무릎은 하루 만에 너덜거린다. 무릎 보호대를 착용했지만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예전에 햄스트링을 다친 왼쪽 다리에 특히 부담이 많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론세스바예스에서 팜플로나까지의 길이 대부분 내리막이라는 것이었다. 이날의 목적지인 수비리까지도 마지막 구간의 급경사를 제외하면, 전날과 비교했을 때 체감 난이도가 확실히 낮아졌다. 이 구간에서는 스페인 쪽 피레네 산간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중간중간 만나는 작은 마을들과 꽃으로 예쁘게 장식된 집들을 구경하며 걸어갔다.


H씨는 수비리까지 가는 길에 공사가 진행 중이라 먼지가 많이 날리고 자갈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알고 보니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 순례자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수비리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에는 가파른 자갈길이 버티고 있었다. 산길에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아서 걷기 힘들었는데, 내리막이 심한 구간을 평탄화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덕분에 순례자들이 조금 더 안전하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내 무릎은 이 내리막을 지나며 또 한 번 크게 혹사당했다.

IMG_5353.jpeg 평탄화 작업이 진행중이던 순례길. 끊임없이 순례자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작업속도는 느린편이다.

세 사람 모두 잘 걷는 편이라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수비리에 도착했다. 길 찾기부터 숙소까지 M씨와 H씨가 알아봐 준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걷기만 하면 되었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멋진 다리를 하나 건너야 했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순례자들이 더운 날씨를 피해 개울에서 시원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개울 근처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머물기로 하고 체크인을 했다. 파리에서는 추위에 옷을 잔뜩 껴입고 출발했는데, 9월 중순 스페인의 한낮은 여전히 뜨거웠다.


근처에서 구입한 음식들로 개울가에서 피크닉을 하며 개울에 들어갈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다리를 건너오며 보았던 사람들이 너무 시원해 보였기 때문이다. 망설이고 있는 사이 M씨가 먼저 개울에 들어갔고, 시원하고 좋다는 말에 결국 나도 물에 몸을 담갔다. 수심은 깊지 않았지만, 산에서 내려온 차가운 물에 들어가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지 무릎 통증도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숙소가 바로 근처라 다행이다.


순례자 일과처럼 샤워를 하고 세탁을 마친 뒤, 저녁을 먹기 전까지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먼저 수비리에 있는 작은 성당을 방문했다. 작지만 제단만큼은 화려한 성당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이기도 하고, 순례길 위에 위치한 성당이기 때문일까. 자원봉사자는 다양한 언어로 성당과 마을 소개, 순례길에 대한 마음가짐, 순례자 축복이 적혀있는 자료를 나눠 주었다. 바스크어로 ‘다리의 마을’이라는 뜻의 수비리(Zubiri)는 12세기에 지어진 마을 입구의 다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 전설에 따르면 다리 기둥 아래에 성녀가 묻혔는데, 동물들이 그 다리 밑을 지나가면 광견병이 나았다 전해진다. 인신공양이 포함된 씁쓸한 전설과는 별개로, 다리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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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이름 유래가 된 다리와 더위를 식히는 순례자들

한낯의 태양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서 숙소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벤치 위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내부는 비어 있어 빈집 같았다. 그 집에는 아기 고양이 세 마리가 살고 있었다. 호기심은 많았지만 동시에 경계심도 강해 쉽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아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니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고, 세 마리 모두 머리를 쭉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양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옳다. 걷지않는 시간 마저도, 이 순례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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