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 이대로.
나는 작고 단순한 일들이 어울린다.
하지만 나의 오랜 열등감은 늘 나와 반대되는 모습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장차 큰일을 맡게 될 요셉을 꿈꾸며.
나는 가끔은 얼른 인정받는 내가 되고 싶은 마음에 일을 벌이고 부풀리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 맞닥뜨리게 될 때면 항상 무대 위에 서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는데, 그 무대는 결코 나의 실력이 이끄는 것이 아니었고 타인의 시선들이 나를 내몰아가는 무대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게 된다. 없던 힘이 나오고,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와서 일을 돕는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나의 것이 아니다.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전까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총구를 겨누는 사람이 없다면, 그 에너지는 찾아와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관객은 없었다 해도 내가 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남에게 악평 받는 것보다 더 비굴한 슬픔이다. 그리고 매번 총구 앞으로 스스로를 떠미는 건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작고 단순한 일들이 어울린다. 작은 종지 그릇, 작은 붓, 작은 돌멩이.
“너는 큰 사람이 될 거야.”
“작다고 말하지 마, 그런 부정적인 말 하지 마. 크게 될 거라고 자꾸 말해.”
“나는 네가 잘 될 거라 믿어.”
진심 어린 누군가의 바램도 있었고, 그저 기분 좋으라고 해주는 말도 있었고, 이 나약한 인간을 살려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해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타인의 말을 인생의 과제로 삼아 살아왔다. '허유리. 무시당하는 삶 살고 싶지 않으면 큰 그릇이 되어야만 해!'
나는 작고 단순한 일들이 어울린다.
이게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일까? 고작 이만한 일밖에 할 수 없으니까, 이만큼 밖에 안되는 작은 가치의 존재라고? 아니, 이제야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큰 대교를 놓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작은 돌멩이 하나씩을 놓아가며, 다리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대교를 '놓아야'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는데, (아니면 무가치한 인간) 진실은 나의 작은 수고로 인해 누군가가 의외의 길을 발견하며 행복해할 때 살아나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길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작고 단순한 일들이 어울린다.
나의 꿈은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에 있지 않다. 골든 리트리버를 키우고, 책과 가까이하며 보내는 쉼이 있고, 이웃들과 가끔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정도. 그 정도이다.
이제는 그런 허황된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 유명 작가는 물론 그냥 작가도 꿈꾸지 않기로 했다. 내 책, 크레딧에 실려 올라가는 내 이름, 저작권 등등.. 그냥, 나는 오늘의 나로서만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이다. 메모장의 조각들이 모두 정리되고 사라지는 날까지만. 그렇게 조용히 영혼을 다듬는 정도의 쓰기만 할 것이다. 매일의 삶에서 나를 발견하며 단순하게만 살아갈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진정한 과제이다.
문득,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의 말이 떠오르며 눈물이 솟구친다. "여러분, 허유리 무시하지 마세요. 점마가 지금 저렇게 공부 안 하고 놀아도, 하면 또 잘 할애에요. 좀만 하면 서울대도 갈끼라고요." 모든 선생님들은 너는 어쩜 그렇게 현실감도 없고, 사고뭉치냐고, 학교는 대체 왜 다니는 거냐고 말할 때. 유일하게 편이 되어주셨던 선생님의 한마디다. 사실 나를 엄청 호되게 혼내시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에 땡땡이치고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던 중, 반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얼마 전 걸려온 동창 남자친구의 전화기 속 목소리가 기억속에서 떠오른다.
"나 학교 다닐 때 어땠어? 네가 보는 나는 어땠어?"
"니는 좀.. 말괄량이 같은 게 있었지.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니였으~ 약아빠진 그런 애는 아니었지~"
그놈의 공부 끝까지 안 해서 서울대 안 갔으면 어때.
그때 좀 철없이 말괄량이같이 살았으면 어때.
이제 그런 부족했던 나를 조금 용납하고, 인정해 줘야 할 때인 것 같다.
아, 역시 이별은 조금 슬프다.
눈물 젖은 콩나물 무침이나 만들러 가야겠다.
나는 작고 단순한 일들이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