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별
[본 글은 2020년 12월의 지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거절감, 거부감, 비교의식, 열등감. 이러한 것들로부터 한 걸음 멀어진 마음이 든다. 올해에 들어설 무렵, 나는 직감적으로 낮아지는 한 해를 경험할 것이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거절과 거부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는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20년 한 해는 정확하게 그런 과정을 내게 제공했다.
늘 해마다 가을이 되면 풍성한 추수를 했어야 했는데, 올해는 흉년에 가까웠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음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던 일과 사람에 대해 거절하는 것을 스스로 연습하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나는 왜 이렇게 호구일까, 내 시간을 못쓰고 왜 엉뚱하게 남들에게 끌려다니며 노동력과 재정과 시간을 착취당했을까.’ 종종 생각해야 했는데 그것의 원인은 외부가 아닌 내게 있음을 알았다.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을 거절함으로 상대방과 단절되는 것이 내심 두려웠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상대방의 온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는 기회가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다. 좋은 기회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도 한 몫했던 것 같다. 탐욕이었다. 내가 착해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외로움에서 나온 결과들이었다. 그래서 이번 한 해 동안 나는 거절하기를 연습했다. 내가 진정으로 마음이 담기는 일이 아니라면 거절했고, 또 많은 경우에 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용납하기 힘든 순간도 있었다. 나잘난 마음으로 살던 내가 거부를 당하는 것이 힘들었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이루어짐은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성취의 이루어짐이 아닌 진짜 나를 이루는 과정이었다.
몇 해전, 회사에서 팀원들과 함께 드림보드를 만드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에 내가 가져온 이미지는 휠체어를 탄 사람들과 함께 무용치료를 하고 있는 여성, 연출석에 앉아 무대를 연출하고 있는 여성, 숲이 보이는 서재를 가지고 왔었다. 계획표가 아니라 막연하게 바라는 미래상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콜라주를 하며 상상했지만, 현실로 돌아와 그 이미지들을 보았을 땐 나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다. 상상은 자유니까.... 뭐 상상도 못 해봐... 감히 미래 계획으로 연결시켜 볼 자신은 없었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떤 곳으로 발을 디디면 그쪽으로 향하는 문을 만날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물어볼 사람도,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 벽에 붙여두었던 그 이미지들을 떼어내 다이어리 사이에 꽂아 덮어버렸다. 마음도 덮었고 당장 가능한 일들을 하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고 어느 날, 운명 같은 마음이 날아 들어왔다. 주일 오전. 집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렸고, 기도하다가 잠들기 일쑤이던 기도 초짜인 내가 나의 생각이 아닌 분명 영이 말하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전심으로. 너무나 간절히.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마음에 병든 자들을 위해 살고 싶은데 지금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소리 냈다. 왜 나는 한 걸음도 뗄 수가 없는 거냐고... 제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이번만큼은 제발 알려주시라고. 방법을 좀 알게 해 주시라고. 나의 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기도했다. 부르짖음이고 외침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울면서 기도를 해야 했고, 기도를 마친 후에 서서히 무언가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길로 가거라.” “이 직업을 선택하거라.” 그런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 모든 생각과 상황이 물 흐르듯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거슬러 몇 년 전에 자주 내 입으로 하고 다닌 말이 떠올랐다. 뒤늦게 무용을 다시 하게 되며 주변 사람들에 “저는 이 무용이 너무 좋은데, 제 몸을 알아서 무용수가 될 수는 없는 것 같고... 이 무용으로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대학원이 있다고 들었던 것도 같긴 한데... 진짜 그런 대학원이 있고 상황이 되면 나중에 가고 싶어요.”
나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심 또 가당치도 않는 꿈을 꾸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대학 졸업장 하나 겨우 어설프게 가져간 내가 대학원 과정까지 수료할 상황이나 능력이 될까.’
그리고 더 거슬러 그 이전에 했던 말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나중에 힐링센터를 차릴 거야. 나는 요가, 책, 영화, 커피, 무용을 좋아하니까 그걸 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게 만들 거야. 사람들 처방에 따라 그룹으로 만들어서 그 그룹에 필요한 책이랑 영화, 요가 동작을 선별해서 즐길 수 있게 하고 몸이랑 마음을 치료할 거야.” 라며 자주 말하고 다녔었다. 그때도 말은 하면서 내심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힐링센터는 돈도 많이 들고 각 분야를 다 섭렵하려면 200년은 살아야겠네... 라며. 그리고 사람을 먼저 더 잘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심리학은 겉으론 재밌지만 속으론 너무 어려운 것이라며... 이것 때문에 배우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나는 돈이 없으니 결국엔 못할 수도 있겠다며....
지난 시간들에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그 말들이 괜히 뱉은 말들이 아니었음을 느꼈다. ‘혹시... 이 꿈 진짜 아니야?’ 감춰두었던 드림보드 다시 꺼내어 손 끝으로 조심스럽게 건들어보았다. 이 길로 향하는 문이 진짜 내 앞에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즉시로 하나하나 알아보기 시작했다. 네이버를 띄우고 “예술심리치료”를 검색했다. ‘아, 진짜 있었네. 내가 바라는 그런 일들이.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명지대학교 통합치료대학원 예술심리치료학과 정보>이 블로그 페이지를 하루에 몇 번을 열어봤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화면을 보고 또 보고. 다른 곳을 알아봤다가 다시 찾아와서 보고. 하루 뒤에 또다시 열어서 읽어보고. 이렇게까지 꼼꼼한 성격이 아닌데 나는 ‘에이~ 안 되겠지.’ 하며 접었다가도 어느샌가 다시 그 화면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나는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종종 언급했던 대학원 진학을 진짜 실제로 한 번 해보려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엄마는 “당연히 딸이 많이 배우고 잘나면 좋지.. 그런데 네가 너무 고생하고 있잖아. 계속 돈 벌면서 감당할 수 있겠어? 결혼은 진짜 안 하려고 그러나..” 하고 말했다. 그건 나도 우려하던 바였다. 비싼 등록금을 나 홀로 감당하기엔 적지 않은 돈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나도 마찬가지로 우려하는 부분이지만 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분명한 일은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 같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우려하는 마음 반, 지지하는 마음 반 그렇게 보내주었다.
면접을 보던 날, 회사에 허락을 받고 잠시 근무 시간 중에 면접을 볼 수 있었다. 하필 영상면접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기도 했다. 나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빈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종이 위를 끄적였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너무 간절하지 말자. 내 안에 있는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니.’ ‘예술과 치유.’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그리고 교수님들을 영상으로 만났다.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해나가는데 마음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울컥거렸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꾹 웃으며 참아내야 했다. 말을 하면서 조금 더 명확하게 내가 오늘 왜 여기 이 영상 앞에 앉아있는지, 나는 어딜 향해 가고 싶은지, 그 마음은 어디에 닿아있는 것인지,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져 온 지난 걸음들.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자꾸만 울컥거렸다.
‘참 잘 왔다.’ ‘되던 안되던 이 면접 자체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 시간인 것 같아. 내 마음을 조금 더 명료하게 알게 되었잖아.’
영상 면접을 종료하고 그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기도하며 눈물을 조금 훔쳐냈다. ‘오늘까지 오도록 인도해주신 분께 정말 감사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게 될지 다른 과정으로 가게 될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도 영상 속에 계신 저 교수님들처럼 그런 아우라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제가 바라던 삶의 상을 살았기 때문에 오늘 그런 아우라를 가지게 되신 거잖아요.. 저도 똑같진 않더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그리고 합격 통지를 받은 날에 회사에선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주었다. “유리 씨가 안되면 누가 돼~ 당연히 될 줄 알았지.” 하면서 한껏 용기를 실어주셨다. 다시 한번 나는 직장인으로서 학생으로서 복잡함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테지만 그 복잡함을 훌륭하다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감사했다.
그렇게 둘러 둘러서 온, 눈물로 가게 된 대학원이었다. 수업 하나하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그렁거리며 반짝이던 내 눈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너무 지나치게 불태우지도 말고, 너무 낙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그저 매 순간에 귀를 한껏 열었고 온 몸으로 감각하며 익히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학기를 돌아보니 실제로 감각이 조금 열린 듯한 느낌이 든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뭔가를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다. 마지막 수업엔 메이크업을 클렌징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표현을 했는데, 지금 정리해보니 그것보다 조금 더 깊이 박피를 한듯한 느낌이 든다. 박피를 하고 나면 피부가 아주 얇아지고 민감해진다. 제때에 재생관리를 하지 않으면 피부가 도리어 이전보다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재생관리의 과정이 충실히 이루어지면 의도적으로 상처 낸 부위들에 새살이 돋아난다. 나는 그렇게 벗겨진 피부 위로 많은 감각을 경험했다. 게다가 보이지 않던 기미도 괜히 더 도드라져 보이고, 수치심을 느끼듯 아주 붉어질 때도 있었다. 바람이 지나면 아렸고, 햇살에게는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으면 안 되었다. 그 감각들은 내게 불편함을 주기도 했지만 기대하는 바가 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첫 단계는 박피가 정말 맞았다. 시작점에서 나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파운데이션이 아닌 천연 성분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재생크림만 듬뿍듬뿍 발라내던 이 과정은 앞으로 민낯으로도 내담자들을 씩씩하게 만날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두꺼운 메이크업. 내가 내담자라면 부담스러울 것 같다. 좋은 상담사라면,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시각적 정서적 이미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굴의 붉은 기운이 조금 가라앉고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처음 난 피부처럼 말갛고 깨끗하진 않다. 여전히 아직 눈에 띄는 잡티들은 많이 있다. 그래도 이 정도 잡티는 그간의 시간을 지내온 흔적이니 부끄러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박피와 재생관리를 시도해야겠다.
이런 낯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거절할 텐데... 겁을 내던 순간이 참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해왔던 도망치기나 진하게 메이크업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랑스러운 낯은 아니지만 나만의 고유함을 더 느끼고 싶었고, 그런 나에게도 더 웃어 보여주고 싶었다.
올해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낮아짐을 경험하고 터널을 통과하는, 혹은 엉켜버린 시간 속을 헤매며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 시간들은 외로움과 절망 슬픔 두려움을 예민한 피부 위로 더 날카롭게 느껴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호시절을 다 지나 보내고 쓸쓸한 겨울만 남겨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민감해진 피부 덕분에 이 겨울 속에서도 멀리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저 멀리서 성실하게 달려오고 있는, 아직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봄바람.
영화 ‘달팽이의 별’에서 시각장애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오셨다. 자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별을 본 적이 없지만 별이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은 없었다고... 밤하늘의 별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봄과 별과 햇살은 우리 무대의 막 뒤에서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 공간에 이미 항상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이 무대를 기꺼이 나와 함께 꾸려나가려 모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비록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내야했지만 그런 사실이 내게 안도감을 주었고,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