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들어갔고 나는 아직 입구에서 서성이는 세계
written by 집순이
D+14.
지금 이 시각 남편은 이력서를 쓰고 있다. 나라면 너무 쓰기 싫을 것 같다. 어제 예배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서 '만약 내일 월요일 아침부터 내가 출근을 하게 된다면?' 상상했다.
끔찍했다. 출근은 끔찍해. 우리는 그 끔찍한 걸 매일 했었어. 그런데, 그러니까 해야 한다면 또 할 수 있을 거야.
요셉이 했던 일들이 전혀 크리스천답지도 않고 잘 풀리지도 않고 의미를 찾기 힘들었던 일들 투성이었다는 어제의 설교말씀이 떠올랐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시고 승리하신다는 걸 삶에서 잘 체험하지 못했다. 아버지 세대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이끄셨는데 요셉의 삶에서 하나님은 대부분 침묵하셨고 그가 고난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의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생각하면 암울하고 무겁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끝내 잊은 적이 없다. 삶으로 와 닿지 않음에도.
D+16.
남편이 이력서를 쓴 곳은 온라인 접수를 받지 않는다. 우편으로 보내거나 직접 방문해야 된다고 한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 역시 세계는 넓잖아? 오늘이 접수 마감일이라 남편과 같이 다녀왔다. 집에 프린터가 없어서 회사 근처에 있는 인쇄소에 들렸는데 인쇄비용이 4,800원이나 나왔고 날은 너무 덥고 주민등록 초본 떼 가야 한다는 걸 남편이 그제야 알아서 다시 정류장까지 걸어가고 버스 타고 주민 센터 가고. 나는 속으로만 하려 했던 걱정과 한숨이 입 밖으로 푹푹 새어 나왔다. 안 돼, 이 남자야, 이렇게 디테일이 떨어지면.. 나는 아직 이력서 낼 곳도 하나 알아보지 않은 주제에 성실한 구직자 남편이 계속 내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나보고 이제 너도 뭐라도 쓰라고, 이력서를 쓰든 소설을 마저 쓰든 하라고 했다. 언제까지 방바닥만 긁고 있을 거냐고. 아니? 나 방바닥 긁은 적 없는데, 에헴.
남편은 반농담, 반진담으로 이제 일은 나 혼자 하라면서 자기는 놀고 싶다고 했다. 이건 남편의 로망이다. 나쁘지 않지. 내가 놀아봐서 알아, 에헴.
여행 가 있는 동안 여행 끝나면 연락 달라고, 면접 보자고 두 번인가 세 번 문자 왔던 출판사에서 지난주에 또 카톡이 왔길래 기회 주셔서 너무 감사하지만 같이 못 할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정중히 고사했다. 전 직장의 누군가가 그 출판사에 날 추천했나? 어떻게 한 회사에서 일 년 동안 나한테 세 번이나 콜할 수 있지.
그럼에도 어찌 되었든 여행가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나에게 관심 가져준 이는 일 년 동안 그분이 유일했다. 가끔 내 sns에 좋아요 누르고 가는 출판사 대표님들이나 에디터, 작가분들에게 내가 muchas(감사하다는 뜻의 스페인어) 감사해한다는 거 아시는지. 그런데 그분들한테 무슨 다른 뜻이 있어 좋아요 누르셨겠냐고. 나야말로 좋아요 남발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인데.
남편이 오늘 재밌는 거 알려줬다. 남자들 중에 지하철이나 버스 탈 때 어떤 여자랑 부딪히면 그 짧은 몇 초동안 그 여자랑 썸 타고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까지 상상하는 사람 있다고. 그런데 오늘 자기가 내민 이력서 받은 직원이랑 인사할 때 그 짧은 순간에 이 회사 입사하고 근무하고 퇴사하는 것까지 상상했다고. 깔깔깔. 우리 모두 상상병 중증.
남편은 금세 취업할 것 같다. 나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고.
언제나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될 것 같은데 나만 앞이 안 보였다.
어떤 분야든 삼십 대 중반에는 막 달려가야 되는 나이인데, 그것도 어느 정도 달성해 놓은 게 있는 상태에서 말이지. 아닌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 이력서를 넣든 경력직은 애매하고 신입으로 넣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라.
아. 역시 재취업은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내일 사람인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우울해져서 탄수화물 파티할 것 같은 느낌. 오후에 친구들이 우리 집 와서 귀국 축하 파티 해주기로 했다. 에어컨 없는 여름 창동 집에서 우는 주인 잘 달래 봐라 얘들아.
* 여행 이후의 삶, 그리고 아직 남은 여행 사진들
집순이 인스타 @k.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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