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정치의 미학화, 미학의 정치화
정치는 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예술은 재현을 목적으로 한다. 성공한 정치인은 시민이 겪는 곤란을 풀어내는 존재이고 훌륭한 예술가는 인간이 겪는 곤궁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정치와 예술은 인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란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대개의 경우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정치와 예술이 섞이는 경우도 있다. 문제 해결의 능력을 지니지 못한 정치꾼과 생활을 그려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삼류 예술가의 사례다. 전자는 정치의 영역에 있으면서 예술의 방법을 끌어오곤 한다. 그래서 공공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처리를 도외시하면서 현상만을 기술하곤 한다.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 “안전사고 예방할 책임 어디 있습니까? 경찰에 있어요”라고 발언한 현 대통령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술계에 속하면서 정치의 수법을 차용하는 이도 있다. 예술가를 참칭 하면서도 그는 가능한 세계를 창조하여 보이지도, 우리의 생활세계를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은 것인지를 판결하는 데 집중한다. 전통적으로는 모든 사태의 원인과 책임을 악당 한 명에게 욱여넣는 작품이 있고, 근래의 형태로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름표를 내세운 숱한 작업물이 있다.
정치와 예술이 긍정적으로 융합하는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대결하는 욕망 안에서 공통의 의지를 발견하고, 대립하는 세력의 갈등을 완화시키며,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면서도 공동체의 비전에 이바지하는, 그러한 정치가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상상에는 제한이 없으니까. 만약 그러한 정치가가 존재한다면 그는 분명 예술가처럼 보일 것이다.
또 문제 되는 상황을 철저하게 그려내어서 그걸 감상하는 이에게 왜 그러한 쟁점이 불거지게 되었는지, 이러한 쟁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끔 하는 예술가가 있다. 집단적 사유는 공적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다. 이러한 예술가는 틀림없이 훌륭한 정치인과 겹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김세인 감독은 훌륭한 정치인처럼 보이는 예술가에 대한 최상급의 예시가 될 것이다.
기능과 디자인 그리고 이정
이정(임지호)이 화장실에서 속옷을 빨고 있다. 수경(양말복)이 아무렇지도 않게 변기에서 소변을 보고, 자신이 입고 있던 속옷을 세면대에 넣은 후에 말없이 이정에게 손을 내민다. 이정은 물기를 짜낸 속옷을 살갑다고는 할 수 없는 눈빛과 함께 엄마에게 건넨다. 수경은 축축한 레오파드 무늬의 팬티를 입고 출근한다.
수경이 난로 앞에서 팬티를 말리며 한 말에 의하면, 그 팬티는 5종 29만 원 세트 중에 한 장이다. 직장 동료가 너무 비싸다고 타박하자 수경은 이제 기능보다는 디자인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수경은 예쁘고 싶다. 퇴근 후의 술자리에서 그녀는 복분자액을 탄 소주처럼 맑고 곱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라는 부사 그리고 예쁘고 싶다는 욕망에서 볼 수 있듯이, 수경은 그동안 기능에만 충실해야만 했다. 그래서 예쁘기보다는 억척스러웠다.
예술 평론에서 인물이 기능적으로 쓰인다는 말이 나오곤 한다. 어떤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데 필요한 윤활제나 창작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와이파이처로만 보인다면, 그 인물을 기능적이라 부를 수 있다. 수경의 삶은 예술작품은 아닐 텐데, 그는 일평생 기능으로 소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은 알게 된다. 39kg의 수경이 4.36kg의 딸을 키우기 위해, 사람들의 땀구멍에서 나온 노폐물과 입구멍에서 나온 욕설을 받아내는 쓰레기통 역할을 감내해왔음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때때로 우리는 남이 자신을 대하는 대로, 남을 대우하고는 한다. 세상 사람들이 수경을 기능적으로만 여겨서인지 수경은 딸을 기능적으로만 대한다. 먹여주고 재워줬으면 됐지, 자신이 하는 잔소리나 손찌검이 잘못된 것 같지 않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딸이 자꾸 사과를 하라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수경은 사과 같은 걸 잊은지 오래다. 기능의 세계에는 용서 같은 게 없으니까.
도구와 달리 인간은 쓰임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처한 자기의 모습과는 다른 자아를 꿈꾸곤 한다. 그래서 수경은 애인인 종열(양흥주)과 함께할 때가 좋다. 쑥좌훈방의 오물통, 딸을 위한 우유통이 아닐 수 있으니까. 그저 오롯이 예쁠 수 있으니까, 또 예쁘다고 해주니까. 숨 쉬려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수경 씨 보려고 물 밖에 나온다는 그의 말처럼, 종열은 수경에게서 기능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본다.
딸은 엄마와 속옷은 공유하지만 성격을 나누지는 않는 것 같다. 엄마가 다혈질인 반면 딸은 내성적인 사람인 듯하다. 자기 체형에 맞는 속옷이 아니라 얼핏 봐도 체구가 작은 엄마의 속옷을 입는 이정. 속옷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지시도 그냥 수긍하고 만다. 팀장이 갑자기 영업을 나가라고 할 때에도 이정은 별말 없이 따른다. 수경과 달리 이정은 뭔가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다. 있다면 그저 집이 밝았으면 하는 것뿐. 그마저도 엄마가 와서 불을 다 꺼버리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래야만 한다
어떤 일인지 마트에서 둘은 다퉜다.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는 수경이 한 꼬마의 손을 쳐서, 아이가 풍선을 놓쳤고 그 풍선이 전등에 닿아 터진다. 140분 동안 감독은 이와 같은 형태로 사태가 흘러갈 방향을 세심하고도 친절하게 극에 새겨놓았다. 이제 모녀 사이는 폭발하고 말 것이다.
엄마의 무례한 행동이 싫었는지 차에 돌아온 이정도 씩씩댄다. 그 모습이 싫었던 수경이 이정을 마구 때린다. 이정이 차에서 뛰쳐나온다. 그때 수경이 타고 있는 차가 이정에게 돌진한다. 이정은 목발 신세가 된다. 수경은 급발진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정은 엄마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믿는다. 평소에도 자신을 자주 때렸고, 심지어 죽이겠다고 까지 했으니까.
영화의 지도에는 두 세계가 그려져 있다. ‘그럴 리가 없다’의 세계와 ‘그래야만 한다’의 세계다. 먼저 ‘그럴 리가 없다’의 세계가 있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을 했다고 항변하지만 종열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서비스센터는 물론이거니와 변호사와 판사 그리고 딸인 이정조차도 수경을 불신한다. 대기업이 만든 차가 그렇게 문제를 일으킬 리가 없으니까.
사과 같은 이상한 말을 해대는 딸에게 수경이 말한다. 자식들 말 안 들으면 다들 때리고 욕하고 그러고 살아. 고깃집에서도 우연히 만난 딸에게 말한다. 나는 누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면 그까짓 잔소리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어. 엄마의 관점에서는 남들 다 그러는 행태를 반복한 것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딸인 이정이 이런 일을 못 받아들일 리가 없다.
회식 자리에서 직장 동료가 이정에게 왜 다리를 다쳤는지 묻는다. 이정은 평소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을 차로 치었는데, 이 사람이 평소에도 자기를 죽이려들었다고 말한다. 동료들의 근심이 커진다. 이정이 보탠다. 제 엄마가 그랬어요. 동료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엄마가 딸을 때리거나 죽일 리가 없으니까.
소희(정보람)는 회식 자리에서 이정의 말을 농으로 치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이정은 어리지만 당찬 소희가 멋있다. 집을 나온 후, 소희의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지기도 한다. 싫어하는 면은 닮는다더니 어느새 이정은 소희에게 자기감정의 배설물을 쏟아낸다. 쑥방에서 수경에게 노폐물을 뿜어댔던 아줌마들처럼 그리고 가게에서 수용해야만 했던 노폐물을 딸에게 뱉어냈던 엄마처럼. 이정은 자신과 유사한 일을 겪은 소희가 나를 안 받아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수경의 애인 종열 역시 ‘그럴 리가 없다’의 세계에 거주한다. 종열은 진심으로 수경이 좋다. 그래서 자신의 딸인 소라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싶다. 수경은 종열과 연인이고 싶지만 종열은 수경과 가족이고 싶다. 진짜 좋아한다면 ‘정상가족’을 이루는 게 당연하니까. 그리고 수경이 자기의 딸인 소라를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야만 한다’의 세계도 있다. 먼저 영화를 보는 우리들. 영화의 초반, 나는 수경을 폐기물로 규정했다. 이해 이전의 판결이었다. 폭력 같은 것을 이해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허나 이해는 반드시 용서와 함께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파악하는 것과 그러한 일이 벌어져도 괜찮다는 것은 같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적지 않은 관객은 수경을 재단한다. 엄마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을 수경이 해내지 못하니까.
수경은 이정이 자기의 행동을 받아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딸이니까. 이정은 소희가 자신의 넋두리를 수용해줘야만 한다고 믿는다. 자기와 같은 처지를 겪은 사람이니까. 종열은 ‘정상가족’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판단한다. 파트너 관계는 가족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그래야만 한다’의 세계는 이런 식으로 ‘그럴 리가 없다’의 세계와 섞인다.
독립영화, 데뷔작 같은 한정을 떼어놓고도 손에 꼽힐 영화
감독 김세인은 뒤엉킨 쓰레기를 묘사하다가 옆에 아리따운 꽃 한 송이 그리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갈 데까지 간다. 뒤엉킨 실타래 하나까지 모조리 필름에 담아내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영화에는 모녀의 감동적인 재회라든지, 모든 다툼을 경감시켜주는 은총이라든지,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할 방법을 요청한다든지 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굳이 희망과 유사한 것을 찾는 이는 소희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소희 역시 이정과 비슷한 일을 겪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엄청난 인내로 이정의 하소연을 받아준다. 20대 후반인 이정이 꿈도 꾸지 못한 독립을 소희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이루었다. 물론 선의가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소희는 사회성이 없다시피 한 이정 덕에 곤란을 겪는다. 그래서 이정과 회사에서 벗어난다. 소희에겐 탈출이 정답이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홀로 서는 방법 중 하나를 터득했다. 의존과 부당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수경과 이정, 모녀는 결국 갈라선다. 영화는 곧 끝나지만 둘의 관계는 이전보다 나아질지도 모른다. 눈 바로 앞에 빛을 들이대는 것은 상대를 실명케 하지만, 거리를 둔 채 비추는 플래시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잘 보게끔 한다. 적당한 거리가 서로에게 이로울 때도 있다. 정전된 밤, 둘은 핸드폰의 플래시로 서로를 비춘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다. 떨어지면, 가까이 있을 때는 싫었던 것들이 그전만큼은 싫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끝, 수경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콱 올라온다. 만둣국을 끓이려 켜놓은, 활활 타고 있는 가스 불처럼. 이전 같았으면 그 답답함을 입으로, 손으로 이정에게 풀었겠으나 이제 이정은 없다. 그는 피리를 분다. 형편없는 솜씨로. 아직은 누군가에게 화를 내지 않고 홀로 감내하는데 미숙한 수경. 그러나 영원히 그 실력이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정이 속옷을 사러 간다. 자기 치수도 몰라 제각각인 사이즈의 속옷을 대충 고른다. 예전 같으면 맞지도 않는 엄마의 속옷을 입었겠지만 이제 엄마는 없다. 직원이 치수를 재준다. 그러려면 이정이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데, 그는 홀로 꼿꼿이 서 있는 게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여생 내내 그렇진 않을 것이다.
감독은 강요된 모성, 가부장제, ‘정상가족’, 가정폭력, 한부모가정, 소외, 고립과 같은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지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는 관객은 앞의 문제를 고민하게끔 된다. 수경 역의 양말복은 이름처럼 너무 뒤늦게 찾아왔다. 배우 양말복 덕분에 수경은 대본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엄마의 배에서 나온 듯한 인물이 되었다. 이정 역의 임지호 역시 놀랍다. 첫 주연이란 게 믿기 어려울 정도다. 140분이란 짧지 않은 상영 시간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관객은 없을 것이다. 독립영화, 데뷔작 같은 한정을 떼어놓고도 손에 꼽힐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