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이후>
지구를 사랑하시는군요. 유달리 분리수거에 열심인 나를 보고 지인이 한 말이다. 당장에 이득이 되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게 신기했던 걸까. 아니면 유난 떨지 말라는 것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플라스틱을 설거지하고, 종이에 묻은 이물질을 떼어 버리고, 비닐에 붙은 테이프와 테이프가 남긴 점성을 철두철미하게 떼어냈다.
당시 나는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다. 그때 내가 최선을 다했던 다른 일은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일이었다. 나인 투 나인의 생활이었으니 어지간한 직장인보다는 길게 사무실에 있었던 셈이지만 나부터 일상에서 배려를 실천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세상이 좀 더 말랑말랑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노력은 직장 생활과 함께 사라졌다. 대학원 때보다 짧은 근무시간이었지만, 일상을 자신이 계획하고 변경할 수 있는 것과 주어진 계획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보고서 v.17’과 ‘보고서 v.18_이제최종이겠죠’의 차이를 구분하다 보니 종이, 플라스틱, 비닐까지 분류하고 싶진 않았다. 온통 내게 시키기만 하니 나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대중교통에선 앉으면 눈을 감았다.
업무의 강도로 보면 대학원 때가 더 강했을 것이다. 훨씬 오래 앉아있었고 훨씬 많은 문자를 처리했다. 내가 다녔던 회사가 고되게 몸을 움직여야 했던 곳도 아니었다. 대학원 때처럼 문서 더미와 컴퓨터 앞에 착석하여 시간을 보내는 형태였다. 나이가 먹어서 기력이 쇠해진 걸까. 그렇게 보기엔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은 지방층을 두르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생존을 위한 운동도 하고 있어서 그때보다 힘도 세다.
그렇다면 나는 왜 다른 사람과 세계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는가. 내 존재의 탄성은 왜 이토록 떨어졌는가. 정체성이 확고해지니 관심과 생각과 행동이 내 안에 갇힌다. 다른 곳으로 뻗어가질 않는다. 늙어가면서 존재의 육질이 퍽퍽해진 탓일까. 노화는 곧 존재의 닭가슴살화였단 말인가. 그런 면도 없지 않겠으나 내 생각에는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것이 존재 경직의 주된 이유 같다.
대학원생 시절의 나는 인류가 나아갈 방향과 우주의 기원과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룬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은 우주를 감쌌다. 이토록 거대한 자의식은 오염될 수 없다. 제아무리 더러운 강물이라도 바다에 들어오면 정화가 되니까. 나의 자의식은 오대양을 넘어 은하와도 같았다. 그러니 약간의 피곤함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에피소드였을 뿐.
반면 나이 든 회사원인 나, 그런 나의 경계선은 170cm 가량의 높이로 규정될 것이다(정확히는 173.5cm라고 우겨본다). 좁은 물 컵에는 잉크가 한 방울만 떨어져도 전체가 더러워진다. 협소해진 존재 속에서 타인이 던진 한 조각의 귀찮음, 실례, 폐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타인과 엮이지 않으려 했고, 어떻게든 신경을 끄려 했다.
마침내 성공하였고 이제 나의 존재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내 몸뚱이의 가장자리에 정확히 고정되었다. 한국, 아시아, 세계, 우주로까지 쭉쭉 늘어났던 내 존재가 이리도 쪼그라들다니. 그것이 슬퍼서 나는 꾸역꾸역 먹어대는 걸까. 이 나이에 키를 늘릴 순 없으니 옆으로라도 퍼지려는 걸까.
존재의 수축성에 대해 고민하려던 찰나, 주간업무보고와 차주업무계획을 작성해야 한다. 나와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관심을 두는 게 지식인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는데, 나는 나와 관련된 일에만 관심만을 두니 무지인이 된 걸까. 지식과 무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할 때에 보고서를 교정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노동은 이런 식으로 존재의 평수를 늘리는 걸 감시하고 감독하였다. 이러한 감시·감독이 몸에 새겨져서, 이제 나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보고서만 처리할 뿐. 주어진 문서 더미만 수정할 뿐. 그러다가 사유가 그리워지면 배달의민족을 켜서 무얼 시킬지를 고민하면 그만이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순간이 아쉬워지면 계획서를 더 꼼꼼히 본다. 그러면 꿈틀대던 성찰의 의지도 잠잠해지는 것만 같고, 내면의 공허도 메워지는 것만 같다.
질(클레망 메타예)은 68 혁명의 절정 이후를 산다. 영화에 담기지는 않았지만 혁명을 준비하고 이행하며, 질의 존재는 타인과 프랑스와 세계와 인류의 미래로까지 팽창했을 것이다. 존재가 너무 넓어져서 중심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질과 혁명가들에게 나아갈 길은 정해져 있다. 목적지를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얼마나 짜릿할까. 나의 존재가 세상 전부를 잡아먹을 듯 거대해진다. 얼마나 뿌듯할까.
그러나 영화는 68년 5월 이후를 담는다. 질은 이제 새로운 관심을 발명해야 하며 동시에 혁명 이후의 노동을 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둘의 성격은 정확히 반대이다. 새로운 관심의 발명은 여유의 확장이고, 노동은 여유의 축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심을 만든다는 건 존재의 확장공사이고, 노동한다는 건 존재의 분할 공사이기 때문이다.
자의식은 과잉될 때 행복하다. 배우 맷 데이먼은 “살찌는 건 너무 쉽고, 즐겁고, 행복했다"라고 말했는데 존재를 늘리는 건 쉬운지는 몰라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반면 노동은 자신의 자의식을 나누고, 구분선을 확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노동의 시작이다.
그러니 철학과 혁명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러니 노동은, 또 일상은 얼마나 시시한 일인가. 질은 이러한 괴리 사이에서 혼란하다. 혁명 이후의 생계유지를 위해, 아버지의 추천으로 간 상업 영화 세트장에서 질은 먹고사는 것의 자잘함에 헛웃음을 터뜨린다. 어떤 친구는 이러한 괴리에 처하지 않고, 혁명을 영원히 이어가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완수한 일을 어떻게 이어가겠는가. 배가 다 찼는데도 끝까지 식사를 이어가겠다며 밥을 영원히 먹을 수 있을까.
다른 친구는 괴리를 고민하지 않고, 원초적인 행복에 빠져들려 한다. 히피 생활이다.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마약을 하는 것이다. 무분별의 흥청망청은 유쾌하긴 하지만 얼마 안 가 모든 것을 망친다. 엔트로피 개념이 주는 교훈처럼 우리 삶의 무질서도는 꾸역꾸역 자라난다. 그걸 누군가가 나서 질서의 형태로 다듬지 않는다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집이 불타게 되는 것이다.
철학이든 혁명이든 존재를 늘려가는 건 즐겁다. 하지만 회사원에겐 철학 할 여유와 에너지가 없고, 질에겐 혁명의 대의와 명분이 없다. 5월 이후를 사는 모든 이는 자기 존재를 늘릴 방향을 발견하거나 발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존재가 자기 몸뚱이라는 실선 안에 갇힌다면, 왜소해진 자아 속에서 ‘이게 다인가’라며 쓴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입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