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
헤겔, 후설, 하이데거
영역별 ‘Best 3’을 뽑는 것은 유구한 전통인가 보다. 혹자는 3대 짬뽕, 3대 헬스(벤치프레스, 스쿼트, 데드리프트) 등을 떠올리며, 그것은 최근 경향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최소 백 년 이상 된 반례를 들 수 있다. 바로 철학의 3h라는 분류다. 헤겔(Hegel), 후설(Husserl), 하이데거(Heidegger)를 뜻하고, 선정의 기준은 난해함이다.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선 3h를 피하라는 철학과 선배의 조언을 들은 바 있었으나, 취업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은 애초에 철학과를 택하지 않는다. 3h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들었으나, 적지 않은 청년이 그러하듯, 상당수의 철학과 학생도 자신을 예비 구루, 잠재적 선지자 정도로 여겼다. 나 역시 그랬다.
세 철학자와 관련된 수업 모두를 수강했고, 모든 제언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는 가르침만을 얻었다. 나의 깨달음을 공유하는 데는 많은 문장이 필요하지 않은데, 가령 하이데거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식이다. (특별히 어려운 구절을 뽑은 게 아니고, 하이데거의 주저를 임의로 펼쳐 인용했다.)
“존재가 물어지고 있는 것을 형성하고 있고 존재가 존재자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한, 존재물음에서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라는 것이 귀결되어 나온다. 이 존재자에게서 흡사 그것의 존재를 캐묻는 셈이다. 그런데 그 존재자가 자기 존재의 성격을 거짓되지 않게 제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존재자가 우선 그것이 그것 자체에서 존재하듯이 그렇게 접근 가능해져야 한다. 존재물음은 그것의 물음이 걸려 있는 것과 관련지어서 존재자에게로의 올바른 접근양식을 획득하여 먼저 앞서 확보할 것을 요구한다.” -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p. 21.
이해하지 못했음을 감추는 방법이 있다. 번역을 탓하면 된다. 역자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일어를 그대로 옮겨놓았군! 그래서 하이데거의 뜻이 전달되지 않은 거야! 여기에 국어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논평 따위를 더하면, 당혹감을 어느 정도는 달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 독해에 큰 정성을 들인 몇몇을 제외한다면, 독일 사람도 하이데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하이데거를 파악하는 것의 어려움은 번역 탓(만)은 아니다.
문제가 생길 때 1. 난관을 드높이기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세상에는 그저 어려운 일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하이데거의 철학일 뿐이다. 앎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경로를 모른다는 걸 알아야 내비게이션을 본다. 자기 삶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그간의 행로를 반추한다. 아는 길이라 생각하면 더 이상 지형을 알려하지 않고,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다고 믿으면 되돌아보지 않는다. 모든 앎의 고향은 같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앎을 얻기 힘든 이유는 자신이 모른다는 걸 직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동시에 자기의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은 피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상당수는 여기에서 편안한 길을 택한다. 모르는 것을 신비화하며 숭상하거나, 미지를 피해서 자신 안으로 숨거나 하는 것이다.
전자는 철학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3h의 현신인양 온갖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지만, 우리 사회에 한 톨의 지혜도 제출하지 못하는 교수가 그렇다. ‘강해’라는 타이틀을 달고 원저의 난해함만을 증폭시키는 책, 본인이 전공한 철학자가 개념을 쉽게 전달하려 활용한 일화, 즉 21세기 한국 대중에게 예시로서 통할 수 없는 사례만을 되풀이하는 강연자, 원론적인 이야기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처방한 듯 구는 자칭 철학자를 나는 무수히 보았다.
문제가 생길 때 2. 눈 감고 편안하기
후자, 즉 알지 못하는 것에서 도망쳐서 자기 안으로 피신하는 인물이 영화 <어파이어>의 주인공이다. 여름의 환한 빛과 달리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검은 옷차림이다. 검정은 빛의 부재 또는 모든 빛의 흡수이다. 그에겐 빛이 깃들지 않은 걸까, 모든 빛이 서려있는 걸까.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코로나 격리 동안 보았고, <어파이어>의 영감을 얻었다던 에릭 로메르 감독의 <여름 이야기> 주인공처럼, 레온도 홀로 검은 옷차림이다. 여름 휴양지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둘은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이창동과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각각 <밀양>과 <스펜서>를 길 잃은 주인공을 비추는 걸로 시작했다. 신애와 다이애나가 삶의 방향성을 상실했음을 은유한 것이다. 페촐트는 검은 옷차림, 자신이 타고 있는 자동차의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으로, 레온이 자기 안에 감금된 인물임을 은유한다. 관객은 곧 레온의 검정이 그가 빛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의 눈치 없음은 자기로의 침잠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동행자 펠릭스(랭스톤 우이벨)는 계획의 고장을 모험의 독려로 해석하고, 지름길을 찾아 숲으로 간다. 레온은 어깨에 짐을 잔뜩 인 채 펠릭스를 기다린다. 무거운 가방이 레온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레온의 정신을 내리누른다. 그리하여 레온은 창작을 위해 찾은 바닷가에서 한 줌의 영감도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가 만든 무게에 눌린 채 말이다.
현실에서 도피하여 자신 안으로 숨은 레온은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게 싫을 뿐이다. 펠릭스와 단 둘이 있을 거라 예상한 별장에 낯선 여자가 있는 것, 그 여자가 밤마다 애인과 사랑을 나누며 교성을 지르는 것, 시끄러운 소리에 제대로 잠을 청할 수가 없는 것, 본인이 뜻한 대로 글이 써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전부가 짜증의 소재가 된다.
눈 감으면 보질 못한다
의미는 차이에서 온다. 차이는 두 개 이상의 무엇을 요구한다. 상대적으로 더 큰 것과 작은 것이라든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라든지 하는 다른 무엇들이 있어야 의미가 발생한다. 반면 레온의 마음에는 인정받는 글을 써야 한다는 조바심만 자리한다. 그의 마음은 단일체다. 그래서 레온은 차이를 알지 못하고, 의미도 알지 못한다. 무의미는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것이기에 레온은 고정관념의 매뉴얼대로 차이를 만든다. 바로 위계에 따른 구분이다.
펠릭스와 나디아(파울라 베어)가 같이 수영 가자는 것을 거절하고, 오롯이 홀로 있는 것을 택한 레온에게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만 하는 순간이 생긴다. 나디아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데비트(엔노 트렙스), 펠릭스, 나디아와의 식사자리다. 데비트는 이야기를 지어내며 유쾌한 분위기를 만듦과 동시에 펠릭스를 유혹한다. (맞다. 남자와 남자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다.) 그때 저녁 내내 심드렁하기만 했던 레온이 데비트를 공격한다. 돈은 얼마나 버는지, 해변의 인명 구조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직업인지 등을 캐묻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명목 아래 눈을 감고 귀를 막았던 레온에게도 의미는 필요했다. 그래서 신분이나 직위의 차이에서 의미를 보충했었다. 즉, 작가 또는 예술가로서의 우월감이 레온을 지탱하는 의미의 축이었는데, 식사 자리에서 데비트가 그 축을 무너트린 것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리자 레온은 그간의 무덤덤함을 보완이라도 하듯이 분개한다.
그렇게 레온이 짜증과 분노를 오가는 동안, 새로 만난 이와 어울리고, 수영하고, 사랑을 나누는 펠릭스는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구상한다. 바다를 보는 사람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찍고, 그걸 병렬하는 작품이다. 성공한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목적에 감금된 레온에게 휴양지는 방해요소만을 제공했지만, 스스로를 세계에 개방한 펠릭스에게는 차이와 의미를 건넨 것이다. (후에 펠릭스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제안 받고, 뒷모습과 앞모습 사이에 텅 빈 바다를 추가할 것이다. 차이가 많으면 의미도 많아진다는 듯이.)
어두운 밤, 펠릭스와 나디아와 데비트가 형광 라켓과 셔틀콕으로 말 그대로 빛을 주고받을 때, 그리고 여기·지금에 몰입함으로써 기쁨의 빛을 뿜어낼 때, 레온은 여전히 어두운 방에 갇혀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처럼 잘못되었다는 인식은 대개 사실이다.
자기 목표에 수감되어 세상을 읽지도 못하고, 세상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레온은, 실상과 달리 나디아가 아이스크림 판매원이라 자신의 작품을 혹평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본인의 글을 읽으러 온 출판사 사장의 사정도 알아채지 못하고 자기의 안위만을 늘어놓을 것이며, 영화 막바지에 비극이 찾아오는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만을 진열할 것이다. 그 어느 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며.
나와서 보라
거의 모든 상황에서 오판하고, 거의 모든 순간에서 고립된 레온은 거대한 상실을 겪은 후에야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거대한 산불이 산소를 집어삼키고, 산소의 부재로 허위에 찬 레온의 자아가 질식한 이후에야 레온은 자의식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그는 이제 자아를 세계로 착각하지 않을 것이다. 에고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에 속한 코즈모폴리턴이 될 것이다.
페촐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보이스오버 기법을 일컬어 현재를 과거로 만드는 기술이라 말했다. 또한 음성이 이미지를 설명한다면 진부한 기법이 될 테지만, 이미지와 다른 음성이 더해지면 신선한 테크닉이 된다고도 말했다. 감독은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파이어>의 끝을 보이스오버 활용의 모범사례로 채워 넣는다. 레온의 글을 출판사 사장이 읽고, 비극이 닥친 순간의 이미지와 레온의 심리를 설명하는 음성을 병치한 것이다. 감독은 영화의 결말을 사건의 시간과 사건 이후의 시간을 섞는 것에 할애한다.
영화는 페촐트의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경쾌한 톤을 유지하는데, 이는 상당 부분 컷의 산뜻함에서 온다. 펠릭스가 이질적인 요소를 배열함으로써 의미를 빚어낸 것처럼, 페촐트는 빠른 컷의 전환으로 더 많은 리듬과 차이를 작품에 새겨 넣는다. <어파이어>는 페촐트의 Best 3 안에 능히 들어갈 작품이며,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숙고, 결단, 행위 등으로 고쳐 읽는 사람이라면 필히 봐야 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