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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03. 2023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거짓에 대하여

<괴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예술을 모르는 아저씨를 위한 변명



살을 에는 듯 추웠다. 휴일이었지만 들뜨기보다는 헤매었다. 피곤했지만 일 외에는 한 것이 없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눈에 띄는 커피숍에 들어가 단 맛이 나는 커피를 시켰다. 마음의 공허를 위장의 충만으로 메꾸려는 심산이었다. 앉아있다 보면 정착한 듯 안정되겠지 하는 궁리였다.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직원이 커피를 줬다. KF 94를 뚫고 나오는 미소를 띤 채.


살가웠다. 아마도 자본주의의 웃음이었을 테고, 프로페셔널의 미소였을 테다. 혹은 나와 상관없는 기쁨의 잔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순간 옛 애인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가 아니면 환하게 웃는 눈동자와 마주할 일이 없으니 납득이 가는 연상이기도 하다. 아저씨의 주책을 바로잡은 것은 서둘러 주문하고픈 뒷손님의 헛기침이었다. 커피를 받으며 어느 기업에 있다던 상사에게 인사를 금하는 법이 타당하다 생각하였다.


진실은 중요하다. 상대의 웃음은 나에 대한 호감이 아니다. 그건 카페 종업원으로서 덕목일 뿐이다. ‘고백 공격’은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상황을 해석할 때 생기는 폐해이다. 그러나 진실만큼 허구도 중요하다. 어딘가에 나를 받아줄 존재가 있다는 허구가 없다면,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진실과만 대면한다면 우리는 비뚤어질 것이다. 어떻게든 다정함의 형상을 찾으려 ‘걸즈바’를 찾거나, 모든 진실을 잊기 위해 고주망태가 될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거짓은 진실이지 않을까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20대 때 처음 보았다.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에 충실하려는 나는 인간 인식의 한계가 분통하다며 주변에 열변을 토해댔다. 많은 소주와 함께여서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홍상수를 블렌딩했던 것도 같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며 내 자의식에 자양분을 주었던 친절한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내 자의식의 기반이 허영이었던 것만큼이나 결국 진실은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원통함도 사실이다. 그땐 그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보곤 달랐다. 이제는 진리가 모두에게 택배처럼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뿌려진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긴다. 심지어 위로까지도 느꼈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너도 모르지 하는 샘통의 심리라기보다는 이만하니 그나마 덜 피곤한 것이고, 내 안에 들끓는 욕망을 감춘 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동시에 이만하니 마음 기댈 만한 곳, 즉 예술이란 게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의 관점으로 전개되는 부분, 미나토와 친구 요리의 담임인 호리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부분, 미나토와 요리와 교장 선생의 시야에서 진행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모든 인물은 공평하다 싶을 정도로 오판하고, 무엇보다도 평등하게 상처 입는다. 그럼에도 섣부르게 이들을 비판할 순 없는 것이 극 중 인물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하는 관객조차도 계속 오인하게끔 이야기(또는 세계)가 엮여 있기 때문이다.


사오리는 아들의 이상 행동이 담임의 학대와 학교 측의 방임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럴싸한 정황을 사실로서 승격시키는 것은 담임이 걸즈바에 다닌다는 소문이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학교에 방문한 사오리는 싱글맘의 극성 정도로 사태를 대하는 담임의 태도와 무사안일의 자세로 문제를 무마하려는 교장의 처신 때문에 괴롭다. 관객은 사오리에 동조하게 된다. 1부처럼, 2부와 3부에서도 관객은 중심인물을 따라 판단할 것이다.


호리는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고 사오리는 이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출판물의 오탈자를 바로잡기를 좋아하는 호리는 이 모든 혼란을 올바로 정리하고 싶지만 어떻게든 문제를 덮으려는 교장의 압박과 지혜의 외피를 쓴 편견과만 마주한다. 호리 역시 싱글맘 가정에서 자랐건만 이쯤 되니 사오리가 싱글맘이란 것만 떠오른다. 학생보다 학부모 대하기가 더 어려운 시기라는 선배 교사의 말과 함께 말이다. 압력과 선입견에 둘러싸인 호리는 무력함과 분노를 느낀다.


“사실이 어떤지는 전혀 상관없어.” 교장의 말이다. 그는 호리가 미나토를 학대했는지, 미나토가 거짓말을 하는지, 사오리가 행패를 부리는지 알고 싶지 않다. 교장에게 사실이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일 뿐이다. 그녀에겐 학교의 안정이 최우선이다. 자신을 드높이기보단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려는 것이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말 못 한 진실들에 짓눌리며 괴로워한다.


요리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한다. 돼지의 뇌를 가지고 있고 요리를 만지면 병이 옮는다는 소문에도 시달린다. 미나토는 요리와 얽히지 않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 아마도 둘은 스스로를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기는 데에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아이 모두는 일상적인 비겁함과 순간적인 거짓말로 상황을 악화시킨다. 우리 모두처럼 말이다.


요리는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린다. 요리가 인간의 뇌가 아니라 돼지의 뇌를 가졌다는 이유에서다. 아버지에게 주먹질은 동성애적 기질의 ‘교정’이었을 것이다. 매일의 가학이 요리에겐 삶이 된다. 아이는 부당한 고통보단 정당한 처벌을 택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질병에 걸렸다고 믿는다. 이러한 자기 인식에서 괴롭힘 당해도 마땅한 존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미나토는 엄마에게 흰 선 밖으로 나가면 지옥에 간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엄마는 (‘정상’) 가족이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이고, 죽은 아빠와도 아들이 가족을 꾸릴 때까지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다 말한다. 미나토는 자신이 엄마가 기대하는 형태의 가정을 꾸릴 수 없다는 걸 알만큼은 성숙했지만 그 모든 게 잘못이 아니란 걸 알기에는 어렸다. 그래서 미나토 역시 스스로를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여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인물은 하나같이 오판하고, 다르지 않게 상처 입는다. 3부는 모두 도시의 전경을 비추는 걸로 시작한다. 극 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일까. 감독은 어떤 해결책을 건넬까. 예술은 질문이지 답이 아니라는 멋지지만 공허한 말을 건넬까. 아니다. 여기에는 나름의 방향이 제시된다.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력적인 선택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거짓을 예술이라 부르자



내 생각에 감독은 세 가지 소재로 자신의 입장을 전한다. 하나는 열차 창문을 비추는 이미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다큐멘터리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주제 선택 때문이기도 하지만 담백한 화면 구성 때문이기도 하다(첫 장편 <환상의 빛>이라는 예외가 있기는 하다). <괴물>에는 감독의 이력에선 드문 극히 인상적인 이미지가 등장한다. 사오리와 호리가 미나토를 찾기 위해 폭우를 뚫고 열차를 찾는 장면이다.


엄마와 담임은 필사적으로 아이를, 진실을 찾기 위해 모래로 뒤덮인 열차의 창문을 긁어대지만 폭풍우는 그러한 안간힘을 헛수고로 되돌린다. 카메라는 그들의 분투를 담아내지 않고 열차 안에서 무심히 창문을 바라본다. 순간의 빛이 모래로 가려지고 다시금의 빛이 또 다른 흙더미에 묻힌다. 카메라는 절규의 장면이라기보다는 샌드 아트를 대하듯이 고요히 응시할 뿐이다. 헛된 수고일지라도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일까.


다른 하나는 교장과 미나토가 관악기를 부는 장면이다. 전에 음악 선생이었던 교장에게 미타노가 거짓말을 했노라고 말한다. 교장은 내막을 모두 알진 못해도 미나토가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다. 자기도 숱한 거짓말을 했고 진실을 말하지 못했으며 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교장은 사실을 묻기보다는 관악기를 건넨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일이라면 후, 하고 불어.”


교장은 회한을, 미나토는 두려움을 후, 하고 내뱉는다. 안정된 소리와 간신히 음이 된 소리이건만 어쩐지 그 둘은 잘 어울려 하나의 화음처럼 들린다. 억울한 마음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는 호리에게는 소음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지나쳐온 비루함에 대한 위무가 될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미지를 뚫고 나갈 용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소리는 말 못 할 이들끼리의 대화가 될 것이고 모두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이 될 것이다.


마지막은 빅 크런치 이야기다. 요리가 미나토에게 한 설명을 빌리자면, 빅 크런치란 우주가 한계까지 부풀다가 터져서 소고기 덮밥은 소로, 똥은 엉덩이로, 인간은 원숭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주가 생기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개념이다. 제아무리 영민한 아이일지라도 이 어려운 가설을 어떻게 이해한 걸까. 그것은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슬픔은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면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폭풍우와 산사태의 날, 미나토와 요리가 자신들의 비밀 공간인 열차로 숨어든다. 빅 크런치의 순간을 함께 맞이하기 위해서다. 모든 게 이전으로 돌아가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더불어 접하려는 것이다. 폭우 끝에 둘은 흙더미를 뒤집어쓴 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빅 크런치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동안을 견디게 해주었으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를 새로 쓰면 된다.


영화 전체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엔딩 화면은 밝게 처리된다. 현실인지 가상인지 불분명한 만큼 말이다. 정리하기 힘든 감정이 솟구쳐 오를 때 화면은 금세 암전 된다. 처음에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여운을 즐기게 해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감독은 아마도 이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 허구임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아이들이 삶을 견디는 허구를 만들었고 만들 것처럼, 당신도 당신만의 허구를 만들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따져 묻는 태도를 어느새 내려놓을 만큼 영화는 좋았다. 단, 엔딩 전에 몽타주 장면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오판하고 가해하는 만큼 모두가 오해받고 피해 받는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까. 감독은 요리의 아버지까지도 껴안는 듯한 연출을 보인다. 물론 가정폭력범과 알코올 중독자에게도 서사는 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려는 게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단, 모든 인물에게 부여된 양가성이 요리 아버지에겐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인물을 메시지의 일관성을 위해서 복원하는 것을 납득할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거머쥔 채 아버지가 폭우 속에 쓰러지는 장면을 빼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한 것은 영화를 보지 않을 만큼의 단점이 되진 못한다. 그보다는 빼어난 작품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는 발악에 가까울 것이다. 



*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 Hannah Arendt, Human Condi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Chicago, 1998,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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