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준 Jul 09. 2024

지나간 것이 되돌아올 때

<기쿠지로의 여름>


상실은 지속된다. 마사오의 여름이 기쿠지로의 여름이 되는 것처럼, 소년의 상실은 아저씨의 상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달린다. 처음부터. 그리고 끝까지. 하지만 열심히 뛰어본들 결국 화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엔딩 시퀀스에서 소년은 한참을 달리지만 오른쪽 화면의 끝 지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외화면에 닿을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앞으로도 소년은 최선을 다해서 달리겠지만 영원히 어떤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완벽히 닫혀 있다. 크레딧 이후에 ‘천사의 종’이 나오는데, 그 종은 흔들릴 때마다 푸른빛의 떨림과 청량한 울림과 그 해의 여름을 소환할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때로는 잠시 잊는 듯하겠지만, 끝없이 돌아오는 그 해의 여름과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여름에는 어머니의 상실이 새겨져 있다.     

끝없는 되풀이 속에서, 계속되는 상실의 공허에서 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실을 메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는 그러한 길은 없다고, 대신 그러한 충격을 추억과 환상으로 견디라고 말한다. 아마도 상실의 폐허가 자신을 에워쌀 때마다 소년은 이상한 아저씨, 좋은 아저씨, 뚱뚱한 아저씨, 문어 아저씨와의 추억을 핥으며 견딜 것이다.     


영화의 끝에서 소년은 아저씨에게 이름을 묻고, 아저씨는 ‘기쿠지로’라고 답한다. 소년의 여름은 이제 기쿠지로의 여름이기도 하다. 소년은 상실을 처음 대면하였고, 아저씨는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당신은 여름을 맞이했는가, 맞이할 것인가. 어쨌거나 우리 모두는 여름을 피해갈 순 없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상실의 지속 또는 지속된 상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 영화를 본 후 이 음악을 듣는 이들은 아마도 나뭇잎 모자를 쓴 소년과 아저씨의 걸음, 고개를 떨군 채 흘리는 소년의 울음, 상실 이후 마주한 아저씨들의 도움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이제는 사라진 여름에 담겨 있다고 회상할 것이다.     


누군가는 환상 장면의 기괴한 연출, 만담을 연상시키는 인물 간 대화, 이상한 코미디 리듬 등을 이유로 이 영화의 현실성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제 수상을 위해 ‘일본적’ 이미지를 억지로 필름에 쑤셔 넣었다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한 환상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상실을 견딜 것인가. 상실은 사라지지 않을 터인데.

작가의 이전글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거짓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