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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끝난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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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Jun 24. 2022

기꺼이 바보가 되어 사랑에 빠지리라

Can't Help Falling In Love


 "날 사랑하긴 했었니?"


 되게 상투적인 드라마 대사 같다고 생각했다. 방금 막 끝나버린 어느 연애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대가 나에게 물다. 즉시 답하는 건 혹시 정 없어 보일까, 부러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가 뭐라고 했더라...?내 마음이 진심이 아닌 걸 이미 알고 있다고 했던가? 막상 그런 말을 직접 들으니 조금 속상했던 것도 같다. 그냥 사귀지 말  그랬다. 괜히 사귀어버려서 다신 연락하지도 못할 사이가 되어버렸. 너란 친구, 그냥 렇게 스쳐보내기엔 너무 아까운데... 이성 간의 사랑은 아녀도, 친구로서 사랑했는데...


 내가 원하는 거리는 늘 상대가 원하는 것보다 가깝거나 멀다.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친구와 연인중 하나를 선택하라 다. 아마 지나갔던 대부분의 연애에서 나는 그저 그들과 '꽤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을 거다. 그들은 그런 애매한 사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우리 사귈래?'라는 질문으로 내 우정을 망쳐놓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친한 친구를 어떻게 떠나보낼지, 깔끔하게 지금 여기서? 아님 좀 지저분해지더라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야 하나?


 그러니까 나에겐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관계가 익숙하다. 그것이 오래 유지되지 않는 것 또한...


 "나는 네가 언젠가 진정한 사랑을 꼭 해보면 좋겠어."


 "그거 되게 복수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너도... 이런 마음을 알았으면 좋겠어. 지금 너한테 내 마음을 말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을 거 같아서..."


 "진심으로 사랑했다, 뭐 그런 얘길 하려는 건 아니지?"


 "글쎄..."


 이제는 친구도, 연인도 아니게 된 한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울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연애라는 것은 깊은 우정의 감정만으로 지속될 수 없는 것일까. 수없이 품어왔던 의문이다. 나는 상대에게 분명히 내 마음을 전달했고, 그가 세운 사랑의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종종 마찰이 생기곤 했다. 그에겐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내 기준으로 상대에 대해 가장 깊은 감정을 품었을 때 연애가 끝난다.


 "니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이란게 뭔지 말해주고 가. 에 해보든지 하게."


 그는 이제 정말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마를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남을 순 없는 걸까? 이렇게 친구 잃되는 게 굉장히 속상했다. 40살의 너를, 50살의 너를 나는 못 볼 거라서. 가끔 연락이나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늙어가는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다. 원래도 딱히 뭔가 해주거나 챙겨주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냥 이런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사귀자고 할 때 거절할걸 그랬나 보다. 이제야 후회가 파도처럼 덮친다.


 그는 연인을 잃었지만,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헤어지고도 계속 연락하자고 떼를 써볼까. 그는 꽤 상냥한 사람이니까 억지로라도 내 옆에 남겠다고 할 거다. 그러나 상대가 고통스러워할 걸 알면서도 곁에 두며 희망 고문하는 건 싫다. 어린애처럼 마음이 막무가내였지만, 이성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생각에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온통 질척임만 남는다. 윽고 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지쳐버려 릿속이 멍해진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니, 아니야. 그렇지만 언젠가 꼭 진짜 사랑을 해 봐. 정말로. 난 니가 행복했으면 좋겠거든."


 결국 '진정한 사랑'이 뭔지 말해주지 않은 채 그는 떠나갔다. 친구로 남을 수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도 없었던 우리는 그렇게 남남이 되었다. 이별의 장면은 꽤나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종종 내 일상을 멈춰두곤 한다. 생생한 기억은 일종의 고문이다. 기억이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하면, 소중한 친구 떠나가는 그 순간으로부터 영영 자유로울 수 없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결혼을 하고, 이혼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지만, 서글픈 기억들은 잘 보관 골동품처럼 반짝반짝 여전히 선명하다.


 그러니까 이 기억이 왜 떠올랐냐 하면...


 조금 전에, 아들을 재우고 유튜브로 노래를 들으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웬 꼬마가 노래하는 영상이 나왔다. 일곱 살 여자 아이가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부르는 영상이었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가사 하나가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현명한 사람들은 말하죠, 어리석은 자들만이 (사랑에) 빠져든다고.' 이 한 줄의 가사가 그날의 이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심 상대방을 어리석다 생각하면서, '뭘 저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라고 반응했던 수많은 이별들 중 하나였다. 불타오르는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연애쯤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연애가 아니래도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잖아. 이별했더라도 어색한 지인으로 남을 수 있는 거잖아. 수많은 생각들을 입밖에 내지 않고 헤어졌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잘 지내라는 인사 대신 "언젠가 네가 진정한 사랑을 해보면 좋겠어." 하는 당부와 함께 떠나갔다. 나는 설거지를 멈추고 속절없이 이별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든 게 분명하게 떠올랐다. 거진 십 년을 잊고 살았던 기억이 한순간에 머릿속을 지배했다.


 현재의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다를까? 덜 아프고, 더 오래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이성적인 끌림은 없었지만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진정한'이 붙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사랑 그 비슷한 무언가'로 부족한가?


 그러나 우습게도, 바로 다음 노랫말을 듣는 즉시 코 끝이 찡해지며 슴이 벅차올랐다. 튜브 화면 속 여자아이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하지만 나는 어쩔 수가 없는걸요. 당신과 사랑에 빠져드는 걸.' 이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이 곤히 침대에서 자고 있을 아들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 몸을 빌어 세상에 난 아이가 성장해 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다는 건, 속절없이 사랑에 끌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 아이를 처음 만나 얼떨떨하던 감상은, 하루가 지나고 일 년, 이 년이 넘어가면서 깊은 사랑으로 변모했다. 금껏 살아오며 '타인을 꽤 사랑했던'기억은 종종 있지만 아이는 '타인'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존재'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견고한 성벽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기꺼이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아, 나는 내가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 옛날 엘비스 프레슬리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노래를 불렀건 간에, 나는 내 아들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며 음악을 감상했다. 가사 하나하나가 박혀 든다. 주 어린 아기인 너. 아장아장 걷거나 짧은 옹알이를 하는 너. 꼼지락 대는 짧은 손가락과 손톱, 연약한 살결과 어린 숨. 이윽고 뛰어다니고, 장난치고, 혼나고, 엉엉 우는 너와 매달려 칭얼거리는 너를 지나 내가 사랑하는 너. 오직 너. 너라는 존재. 그 존재가 날아와 박혀 든다. 감정이 벅차오른다. 온통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는 건, 특히나 사랑에 절절매며 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구는 건, 어리석은 자들의 특권이라 냉소하던 내가 너를 만났다. 너를 안아 들 때의 충만감, 그 가득한 사랑이 온통 나를 채운다. 사랑은 바보들이나 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기꺼이 바보가 되어 사랑에 빠지리라! 사랑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언젠가 네가 진정한 사랑을 해보면 좋겠어'라고 말했던 그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생각한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만의 '진정한 사랑'을 찾았노라고.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진 몰라도 고맙다고.  아이를 향한 마음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에 너를 꽤 좋아하고 존중했다고.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빠진 나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If I,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things are meant to be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For I,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Can't Help Falling In Love]

     by Elvis Presley


내 아들만큼
나를 온전히 내려놓게 하는
그런 사랑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사실,
그런 걸 찾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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