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본문 p.225
� 전 세계 13개국 수출, 뉴욕타임스 선정 '주목할 만한 책 100선'
� 화제의 뮤지컬 '파과' 원작 소설
한국 소설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질 새로운 여성 서사를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 '파과'는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가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느끼는 변화를 담고 있다.
이름은 조각(爪角). 한때 ‘손톱’으로 불리던 그녀는 40여 년간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으며, 날카롭고 빈틈없는 깔끔한 마무리로 ‘방역 작업’을 처리해왔다. 하지만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한편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평생을 되뇌어온 조각의 마음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난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는가 하면, 청부 살인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발견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외면하고 살아온 조각의 눈에 타인의 고통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조각의 마음에 온기가 스며든다.
아이보리 펠트 모자로 잿빛 머리를 가리고
잔잔한 플라워 프린트 셔츠에
수수한 카키색 리넨 코트와 검정 일자바지 차림의 이 여성은
짧은 손잡이의 중간 크기 갈색 보스턴백을 팔에 건 차림으로
실제 연령 65세이나 얼굴 주름 개수와 깊이만으로는
여든 가까이 되어 보인다.
본문 p.8
입이 몇 갠데 네 개만 드셔.
이거 보기보다 얼마나 오래가는데요.
두고 드시지.
본문 p.93
이 소설은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구병모 작가는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를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데 그 뒤로도 그는 가끔 궁금했던 게 있다.
그녀는 왜 굳이 정성 들여 제대로 된 약을 챙겨주었을까?
_30대의 젊은 방역업자 투우
굳게 닫힌 그 문은
틀림없이 며칠 새 그 방을 들락거린 친척 동생을 의심함이었으며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행복의 절정에서 밀쳐져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했고,
그 혼란은 곧 불안이나 수치심보다는 분노로 바뀌어
소녀는 자신이 원인 제공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당신들이 뭔데, 나를.
본문 p.150
어째서 이 중요한 순간에
목표물을 놓치고 타인을 도와버렸을까.
.
.
쯧.
본문 p.188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본문 p.244
미안합니다. 그건 나 때문입니다.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
.
.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니까요."
"압니다."
_자신을 치료해 준 강 박사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된 조각
"네가 바로 그 애구나."
"정말, 기억해?"
.
.
.
"머리 좀."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_조각을 경멸하는 투우의 죽음
‘파과’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부서진 과일, 흠집 난 과실이 그 첫 번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 나이 16세 이팔청춘, 즉 가장 빛나는 시절을 뜻한다. 우리 모두 깨지고 상하고 부서져 사라지는 ‘파과(破果)’임을 받아들일 때, 주어진 모든 상실도 기꺼이 살아내리라 의연하게 결심할 때 비로소 ‘파과(破瓜)’의 순간이 찾아온다. 이처럼 소설 '파과'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다.
노부인은 팔꿈치에 보스턴백을 걸고 걷다가 문득 그 팔을 허공에 뻗어본다.
피하지방이 없는 메마른 손등과 그 끝에 빛나는 다섯 개의 손톱을 본다.
각각의 긴 손톱마다 그녀가 입은 시폰 셔츠와 같은 어두운 감색이 밤하늘처럼 칠해져 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삼아 노랑, 연주황, 하양, 연두 등 저마다 다른 색과 무늬의 무정형 도안이 각각 다른 좌표에서 시작하여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게 표현되었는데 그 모습은 밤하늘의 다양한 불꽃놀이를 표현하려는 의도였을 테지만 손을 높이 들어 달리 보면 여러 종류의 과일 열매처럼도 보인다.
본문 p.340
고립된 60대 여성 킬러 조각을 통해 인간이 가지는 근원적 외로움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파과'는 인간 내면의 균열과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담담한 문체로 이야기한다. 소설 '파과'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이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 속에서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이,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기꺼이 살아내는 모든 것들에게 따뜻한 응원과 위로를 전한다.
삶의 정글 속에서 부서져 사라져가는 존재의 운명.
고독하면서 아름답고, 잔인하면서 슬픈 이야기.
2025년 개봉 예정인 영화 '파과'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