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 조용한 말실수 하나

“감정은 문장을 가장한 채 흘러나왔고, 그 말이 마음의 균열을 열었다.”

by someformoflove


오늘 아침은 특별할 것 없는 시작이었다. 하린은 조용히 사무실에 도착했고, 준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날 밤, 핸드폰을 들었다가 수없이 껐다 켰던 일이 떠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 너무 많았던 하루였다. 그 여운은 아침의 조용한 공기에도 남아 있었다. 서로를 향한 인사는 이전과 같았다. “안녕하세요.” “네, 잘 오셨어요.” 그 짧은 교환에 감정을 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노력할수록 마음은 더 진해졌다.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서는 하린의 뒷모습을 준은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아버렸다는 걸 부정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회의가 길었다. 많은 말들이 오갔고, 대부분은 빠르게 잊혀질 정보들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이상하게 오래 남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이건 하린 씨가 잘하실 것 같아요.” 준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었다. 회의 도중이라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하린은 그 말이 어딘가 불편하게 다가왔다. ‘왜 지금 그 말을 했을까.’ 아니,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자주 떠올리고 있었던 걸까. 말은 짧았지만 감정은 길었다. 하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생각보다 더 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산공원의 점심, 함께 마신 커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시간들.


회의가 끝난 후, 하린은 자리에 돌아오며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음악을 틀었다. 평소 듣던 곡이었지만 오늘따라 가사가 귀에 더 크게 들어왔다. ‘말하지 못한 말이 마음에 남는다.’ 그런 구절이 반복될 때마다 그녀는 멈춰 서고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의 감정은 이미 걷기 시작한 마음이라, 되돌아가는 길이 없었다. 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화면을 스크롤했고, 메신저 창에 떠 있는 준의 이름을 몇 번이고 올려다봤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선 그와 나눴던 말들이 계속 떠올랐다. 특히 그 말. “이건 하린 씨가 잘하실 것 같아요.” 왜 그 말에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고, 하린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팀원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도착한 곳은 사무실에서 가까운 작은 카페였다. 평소엔 동료들과 함께 오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혼자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한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창밖에선 햇빛이 느슨하게 깔려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길을 걸었다. 그런 평범함 속에서 그녀는 감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감정은 정리가 아니라 가만히 두어야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탁자 위 컵받침을 돌리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 말이 마음속에서 오래 울렸다.


준은 그녀가 없는 점심시간을 어색하게 보내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앉아 있었지만, 자꾸만 그녀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침, 자신이 무심코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건 하린 씨가 잘하실 것 같아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습관처럼 나온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니, 말하는 순간부터 뭔가 균열이 생겼다는 느낌. 그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가 길 것 같았다.


오후가 시작되고, 하린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말을 건네려다 멈췄다. 하린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지만, 그 눈빛엔 어딘가 굳은 결심 같은 것이 엿보였다. 조용한 시간이 흘렀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일을 이어갔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같은 문장에 머물러 있었다. “이건 하린 씨가 잘하실 것 같아요.” 그 말이 가진 무게는 둘 다 알고 있었다. 무심한 척 말했지만, 감정은 이미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오후 늦게, 작은 팀 회의가 있었다. 다시 마주 앉게 된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정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문서 하나를 설명하던 중, 하린이 말했다. “이건 준 선배가 먼저 하신 거라… 그 기준대로 하죠.” 말은 평범했지만, 목소리는 달랐다. 아주 약하게 떨렸다. 준은 그 떨림을 느꼈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말에, 서로가 너무 많이 반응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하려 했던 말들이, 점점 더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퇴근 무렵, 둘은 복도에서 다시 마주쳤다. 하린이 먼저 고개를 들었고, 준이 입을 열었다. “오늘 말이 좀 많았죠, 내가.” “아니요, 괜찮았어요.” 짧은 대답. “그냥, 하린 씨 얘기하다 보니까…” 멈칫. 그 순간 둘 다 알았다. 이 말은 더 나아가면 안 된다는 걸. 하린은 고개를 숙였고, 준은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둘은 함께 탔다. 거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은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하린은 오늘의 모든 대화를 하나씩 복기했다. 말실수 하나, 그 하나가 이렇게 큰 파장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조용한 말이었지만, 마음을 흔들었다. 준도 같은 시간, 소파에 앉아 오늘 하루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은 왜 그렇게 나왔을까.’ ‘왜 하필, 하린 씨라고 말했을까.’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 물음은 오늘 하루 내내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조용한 말실수 하나. 그건 결국, 마음이 먼저 말해버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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