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은 출근길에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 늘 듣던 음악이 괜히 마음에 걸릴까 봐 그랬다. 어제 들었던 노래, 어제 지나친 거리, 어제 함께 걷던 골목의 잔상이 귓가와 발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도산공원 근처의 햇빛, 커피컵을 들고 있던 하린의 손, 함께 마주 앉아 있던 그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많은 말을 나눴던 그 한 시간은,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했지만, 그 아무렇지도 않음은 더는 진짜 같지 않았다. 도착한 사무실은 여전히 조용했고,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없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실망하는 마음이 겹쳤다. 누군가를 계속 신경 쓰게 되는 건,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거기로만 향했다.
하린은 오늘 10분 늦게 출근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준비하는 속도가 늦어진 것도 아니었고, 아침이 유난히 바빴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을 나서기 전 옷장을 오래 들여다보다 멈춰 있었고, 출입문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와 책상 위의 머리끈을 가방에 넣었다. 출근길은 전날과 같았지만, 마음은 훨씬 더 복잡해져 있었다. 어제의 점심, 도산공원, 테이블 사이의 거리, 말하지 않은 말들. 그 고요했던 순간이 오늘 하루의 모든 감정을 선점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책상 위 노트북을 열었다. 평소보다 더 부드러운 동작으로 타이핑을 시작했지만, 시선은 자꾸 왼쪽 모니터 너머로 움직였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린이 고개를 돌리자 준이 서 있었다. 말투는 가벼웠고 표정도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엔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네. 커피 고마웠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하린은 말한 뒤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조심스러웠고, 말끝은 조금 흐려져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대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건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을 꺼내면 감정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그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에 앉았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척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척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후쯤, 간단한 보고서를 함께 검토하게 되었고, 마주 앉은자리에서 파일을 넘기며 말을 주고받는 사이, 둘의 대화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다시 수정했죠?” “아… 아니요, 그건 어제 기준으로 두자고 하셨잖아요.” “그랬나… 미안해요, 내가 기억을 잘못했나 봐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소한 오해였지만, 그 침묵 속엔 자꾸만 감정이 섞이려 했다.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고, 내용도 업무적이었지만, 하린의 말끝이 조금 더 단단하게 들렸고, 준의 말은 자꾸 조심스러워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대화는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 조절의 수단이 되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하린은 오늘 하루를 자꾸 복기하게 되었다. 괜찮은 척을 몇 번이나 했는지, 웃는 척을 몇 번이나 했는지, 무심한 척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그 모든 척들이 오늘 하루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앉아 있던 의자를 밀며 그녀는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이 처음으로 뚜렷하게 떠올랐다는 건, 이제 그 척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의미였다.
“같이 나가실래요?”
준이 말했다. 퇴근 준비를 하던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살짝 피했다. 하린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인 것도, 고개를 저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말없이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말없이 사무실을 나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나란히 서 있었다. 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도산공원, 예전엔 자주 갔었는데 요즘은 좀 멀게 느껴지더라고요.”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의 여운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스며들었다. 그곳에서 함께했던 점심, 아무 말 없이 머물렀던 테이블, 창가로 스치던 햇살. 그 모든 장면이 다시 떠올랐고, 감정은 그 안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길을 걸으며 하린은 말했다. “오늘은 그냥… 말이 좀 무겁네요.”
준은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볍게 하려 해도 잘 안 되죠.”
“그쵸.”
짧은 대화였지만, 둘 다 마음이 흔들렸다. 감정은 말의 무게에 영향을 받는다. 무거운 마음은 가벼운 말도 눌러버리고, 말은 결국 마음의 무게를 반영하게 된다. 그런 날이었다. 말 한마디가, 발걸음 하나가, 창밖을 바라보는 방향 하나가 너무 많은 걸 말해버리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잠깐 멈췄을 때, 하린은 말했다. “여기서 가요. 괜히 같이 있으면, 티 날 것 같아서.”
준은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 봬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준이 멀어지는 발걸음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건 더 이상 어렵다는 걸 오늘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그날 밤, 둘은 같은 시간에 핸드폰을 켜고, 같은 사람의 이름을 검색창에 올렸다. 그리고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 이름만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은 척의 끝은 결국 이렇게 온다. 너무 많은 마음이 쌓인 뒤, 침묵도 말을 대신하지 못하게 될 때. 내일은 또 어떤 척을 해야 할까. 둘은 같은 시간에, 같은 문장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