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마주칠 수밖에 없는 거리

by someformoflove

하린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자꾸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딱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일 것 같아서였다. 사무실의 공기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오전 업무는 생각보다 수월했지만, 마음속은 하루 종일 정리되지 않는 문장들이 흐르고 있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도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그 짧은 순간에 어제의 하루가 고스란히 되감겨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은 그 연장선 같았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한 표정들. 그런 날엔 누구든 투명해진다. 말이 적을수록 마음은 무거워졌다.


“나가서 뭐라도 먹고 올게요.” 하린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냥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기 싫었고, 입맛이 없어도 걸어 나가고 싶었다. 복도를 걸으며 핸드폰에 지도를 띄웠고, 방향은 자연스럽게 도산공원 쪽으로 향했다. 예전부터 혼자 걷기 좋은 길이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고, 식당에 들어가고, 조용한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먹다 보면 머릿속이 잠깐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유난히 햇빛이 차분했고, 하늘도 맑았다. 이런 날엔, 생각도 선명해질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혼자 오셨어요?” 직원이 물었고,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었지만, 무엇을 먹을지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주문을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 무심히 움직이는 나뭇잎, 어딘가 익숙한 스피커의 음악. 그런 것들 속에서 그녀는 오늘의 마음을 조용히 녹여내고 있었다. 갑자기 햇빛이 유난히 따사로워졌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다시 봤다. 순간, 그녀는 문득 누군가의 그림자를 느꼈다. 너무 익숙한, 그리고 너무 낯선 느낌의 그림자.


“여기… 앉아도 돼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준이었다.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 손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그녀를 본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친 건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응… 괜찮아요.” 하린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준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둘 사이엔 갑작스럽게 정리되지 않은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여기 자주 와요?” “가끔요. 조용해서요.” “그렇죠. 햇빛도 잘 들고.” 그런 말들 사이로, 숨겨둔 마음이 조금씩 드러났다. 말이 어색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도, 그 속에 감정이 스며들었다.


준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하린은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 서로를 보지 않기 위해 창밖을 보는 척했고, 창밖을 보면서도 서로의 말투만 듣고 있었다.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준의 말이었다. 하린은 잠깐 멈칫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서요.” “나도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 감정이 많았다. 말이 줄어드는 이유는 말이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정이 많아서였다. 무거운 걸 들기 위해선 자세를 고쳐야 하듯, 무거운 말을 하기 위해선 고요가 필요했다.


식사가 나왔고, 하린은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준은 함께 주문하지 않았기에 마시는 커피 외엔 할 일이 없었다. 조용한 식사였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만으로도 말이 충분했다. 둘은 마주보지 않고, 동시에 웃지 않았지만, 감정은 함께 흘렀다. “밥… 잘 먹는 편이네요.” 준이 농담처럼 말했다. “생각 보다요.” 하린도 웃었다. 그 웃음은 오늘 처음 지은 웃음이었다. 둘은 그 웃음이 오래 남을 거란 걸,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하린은 컵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오늘, 나올 땐 혼자 있고 싶었는데…” 말을 멈췄다. 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근데… 괜찮네요.” 그 말에 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묻지도, 해명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말이 전부였고, 그 말 안에 그들의 오늘이 다 들어 있었다. 감정은 때로 그렇게 짧은 문장에서 더 또렷하게 남는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둘은 따로 걷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함께 걷는 것보다 혼자 걸어야 정리되는 감정들이 있었고, 그 감정은 말보다 걷는 속도에 맞춰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린은 천천히 걷다가 도산공원 입구에 잠깐 멈춰 섰다. 준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졌고,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그리고 조금 외로웠다. 감정을 정리하려는 노력은 때로 감정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걸, 그녀는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준은 사무실에 먼저 도착했고, 자리에 앉아 메신저 창을 열었다. 하린의 이름은 여전히 상단에 떠 있었고,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문장을 쓰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관계가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말이 없어도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어떤 관계보다 더 진하다는 걸, 그는 오늘 느끼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하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계속 떠오르는 건, 햇빛, 커피, 창밖의 나무, 그리고 테이블 너머 앉아 있던 준의 손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장면이었지만, 그 평범함 속에 오래 기억될 감정이 있었다. 오늘은 조금 다른 하루였다. 어제와 다르지 않으면서도, 어제와 이어지지 않는. 감정은 한 번 피어나면 다시 접어두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오늘 확실히 느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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