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모른 척하는 연습

by someformoflove

출근길, 하린은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있었다. 늦은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줄어든 시간에 도착하고 싶었다. 오늘따라 숨기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말투, 표정, 시선, 그리고 손끝에 남은 어제의 온기. 마주치는 건 싫지 않았다. 하지만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모른 척하는 사람의 얼굴엔,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그녀는 로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특별한 표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 무표정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감정을 없앤 게 아니라, 감정을 덮는 표정.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선 더 많은 감정이 필요했다. 그게 요즘 들어 자주 느끼는 아이러니였다.


준도 같은 아침을 지나고 있었다. 문을 닫고 나서 열쇠를 두 번 확인하고, 되돌아와 고양이의 물그릇을 다시 채웠다. 출근 시간이 넉넉했지만 괜히 집 안을 서성이다 늦게 나섰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동안 하린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제의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고, 그중 일부는 아주 작게 반복해서 들려왔다. 그녀가 건넨 말이 아니라,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들. 감정이 말보다 먼저 흘렀던 순간. 지금은 그걸 되감는 중이었다. 감정을 숨기려면 오히려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마음이 없으면 무심해도 되지만, 마음이 있을 땐 무심한 척해야 하니까. 그건 일종의 연기였고, 그는 그 연기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 눈을 피하고, 말을 줄였고, 때로는 오히려 불필요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린이 웃을 때마다 안도했고, 웃지 않을 때마다 불안해졌다. 그건 분명 모른 척의 태도가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둘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유난히 자주 시야에서 벗어났다. 서로를 일부러 피해 가는 듯한 동선, 인사하면서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타이밍, 말의 끄트머리를 넘기듯 이어가는 태도. 그건 어색하지 않은 척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리였고, 그 거리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서로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대신 ‘팀장님’, ‘이거 부탁드릴게요’, ‘그거 확인되셨죠?’ 같은 문장만 오갔고, 이름 없는 말들 사이엔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떠돌았다. 서로에게 보내는 눈빛은 없었지만, 눈빛을 보내지 않는 방식이 오히려 더 자주 느껴졌다. 사람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 더 많은 행동을 한다는 걸 오늘따라 더 자주 실감하게 되었다.


점심시간, 둘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앉아 있었다. 일부러 섞여 앉았고, 식당의 소음 속에서도 이상하게 그 사람의 젓가락 소리만 귀에 들어왔다. 하린은 반쯤 남긴 국을 젓고 있었고, 준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다시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무심히 던진 “둘이 요즘 왜 이렇게 어색해?”라는 농담이 테이블 끝에서 튀어나왔고, 그 순간 하린은 고개를 숙였다. 웃는 척을 했지만 입술만 움직였고, 준은 물을 마시는 척했다. 그 한마디가 너무 크게 들렸다.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말 한 줄이, 두 사람의 하루를 무겁게 바꿔놓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색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기엔 마음이 너무 시끄러웠고, 아무 일도 있었다고 말하기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후 내내 하린은 자신의 손동작에 민감해졌다. 손가락을 너무 오래 들고 있지 않았는지, 문서를 넘길 때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는지, 화면을 보면서도 자꾸만 창밖을 본 건 아닌지. 그렇게 자신을 감시하느라 집중을 잃었고, 몇 번의 실수를 반복했다. 준도 마찬가지였다. 메신저를 쓰다 이름을 잘못 입력했고, 문서를 정리하다 그녀가 담당한 부분에서 몇 초간 멈칫했다. 그건 단순한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모든 에너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데엔 기술이 필요했고, 그 기술은 아직 서툴렀다. 더구나 숨기려는 감정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을 때, 사람은 자주 실수한다.


하린은 퇴근 무렵 슬그머니 사무실을 나섰다. 먼저 가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고, 고개만 살짝 숙인 채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준은 그 모습을 보았지만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다시 모니터를 켰다. 화면엔 할 일 목록이 남아 있었고, 그 안엔 그녀와 함께 처리해야 할 항목들이 몇 줄 있었다. 그는 마우스를 천천히 움직이며 그 리스트를 읽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옆에 있는 메모를 지우려다 멈췄다. 그 메모엔 별거 아닌 숫자 하나가 적혀 있었고, 그 숫자는 어제 그가 그녀에게 보냈던 자료의 버전 번호였다.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지금 너무 많은 의미로 다가왔다. 그건 어제의 기록이었고, 오늘 지우지 못하는 기억이었다.


하린은 지하철을 기다리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음악은 나오지 않았지만 귀를 막고 싶은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중 절반 이상은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꾸로 재생해보며,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새어 나왔는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 계산은 항상 늦는다. 말은 이미 들려졌고, 눈빛은 이미 전해졌고, 멈춰야 했던 말투는 이미 마음을 스친 뒤였다. 그녀는 전광판의 숫자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게 제일 어렵다.” 그리고 그 말이 마음 안쪽으로 너무 크게 들려, 스스로 놀랐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 있었다. 준은 고양이에게 장난감을 던졌고, 고양이는 받아주지 않았다. 창밖에선 비가 올 듯 말 듯한 기운이 있었고, 어둠은 깊어졌지만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컵을 들었다가 놓고, 핸드폰을 켰다가 껐다. 메시지를 보내지 않기 위해서, 너무 오랫동안 그 화면을 바라봤다. 보낼 말은 없었지만, 떠오르는 문장은 있었다. “내일은 조금 더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하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불을 끄지 않았고, 눈을 감지도 않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어디에도 눕지 못한 채 떠 있었다. 그녀는 오늘 하루 동안 모른 척했던 모든 감정들을 하나씩 되새기고 있었다. 숨긴다고 사라지는 감정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걸 더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둘은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로비에서 마주쳤고, 서로 동시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말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그 고개 끄덕임 안엔 어제 하루 동안 쌓였던 말들이 접혀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얼굴로 다시 시작하려는 연습. 하지만 그 연습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걸, 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감정은 숨기는 데 쓰기엔 너무 투명했고, 그 투명함은 자주 들켜버리기 마련이었다.

이전 07화6장 — 사소한 말이 너무 크게 들리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