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은 그녀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 일어나는 순간 공기가 달라져 있다는 걸 느꼈다. 침대 가장자리, 따뜻하지만 조심스러운 체온의 잔상.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깨어 있다는 걸 그는 알았다. 숨소리의 리듬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고, 말이 불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동시에 찾아왔다. ‘어떻게 이 방에 도착했을까.’ 되돌아보면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쌓여 여기까지 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조심스럽게 피하지 않았던 결과.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감정은 늘 징조를 보낸다. 그리고 사람은 그 징조를 모른 척할 뿐이다.
하린은 이불속에서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준의 팔에 닿지 않도록, 그러나 너무 멀어지지도 않도록. 애매한 거리, 그게 지금 그녀의 마음이었다. 어제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손, 눈빛, 그리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말들. 그녀는 생각했다. ‘이건 후회할까.’ 그리고 바로 이어진 속삭임.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지금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아닐까.’ 그녀는 그 방의 공기가 자신을 너무 솔직하게 만든다고 느꼈다. 조심히 눌러온 감정들이 이불속에서 더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침묵은 감정을 더 크게 만든다. 그건 언제나 그랬다.
준은 조용히 몸을 돌려 하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깊게 잠든 얼굴은 아니었다. ‘지금 말하면 무너질까.’ 그는 잠시 망설였다. 말하지 않아도 많은 걸 나눈 밤이었다. 그런데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겼다. ‘이게 감정이라면, 너무 조용히 흘러버렸고, 만약 욕망이라면, 너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지금, 어제보다 더 조용히 흔들리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방 안의 공기는 정적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눈을 떴다. 마주친 눈빛은 놀랍도록 담담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그러나 그 속엔 밤새도록 삼킨 감정이 고여 있었다. 하린은 작게 물었다. “잘 잤어요?”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하린 씨는요?” “잠은 잤어요. 마음은 좀…” 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 여백이 감정을 다 말해주고 있었다. 준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하린은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고, 대신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끝일 수도 있겠지.’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런 생각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더 조용히 이 순간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그들은 말없이 방을 정리했고, 말없이 옷을 챙겨 입었다. 커튼 너머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고,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모르고 있었다. 호텔을 나설 때,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다시 와야 할까.’ 그런 생각이 서로의 마음속에서 동시에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건 아무 말도 없었다. 말하지 않았기에 지켜진 것도 있고, 말하지 않아서 남겨진 것도 있었다.
하린은 준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주머니 속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우리, 지금 무슨 사이일까요.” 마음속에만 맴도는 문장이었다. 말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안고, 안으면서도 감정을 묻는 그 이상한 형식. 그녀는 말했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그러네요. 이상하게 맑아요.” 그 말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았지만, 말투엔 모든 감정이 실려 있었다. 말보다 표정이 먼저 반응하는 아침이었다.
각자의 길로 돌아가던 그날, 하린은 오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감정이 흘러버릴 것 같았다. 준은 업무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모든 감각은 그녀가 없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건 방의 공기, 이불속의 체온, 그리고 그녀의 말 없는 눈빛. 말은 없었지만, 그 방엔 너무 많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그 여운이 귓가를 스치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다는 걸. 이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질 거라는 걸.
그날 밤, 하린은 불도 끄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창밖 불빛이 천장에 얇게 퍼졌고, 시선은 그 빛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쉰 뒤, 아주 작게 말했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네.”
그러곤 입을 닫았다. 혼잣말이 입술 끝에서 뭉개졌다. 생각보다 조용한 밤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마음속 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리는 밤.
같은 시각, 준은 침대 옆 컵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마시지도 않은 물이 식어 있었다. 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했으면, 덜 흔들렸을까.”
그 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곧 방 안 공기처럼 가라앉았다.
그 밤의 체온은 식었지만, 그들이 삼킨 감정은 아직 어딘가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