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은 점심시간에 일부러 혼자 나갔다. 예전엔 함께 가던 식당이었지만, 오늘은 조용히 혼자 밥을 먹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얼굴로, 아무런 감정도 없는 척.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 ‘점심 먹었어요?’ 그 다섯 글자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보내지 않은 말이 하루 종일 마음속에 남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 위로 어젯밤 ‘부재중 통화’ 하나가 흘렀다. 오래 만났지만 이제는 통화 연결음조차 피곤해진 누군가. 연락이 와도,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는 관계. 보낸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어려운 이유가 두 사람에게 동시에 있었다. 혼잣말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히 불편해질까 봐…” 그런데 그 말조차 설득력 없었다. 이미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진 감정이었다.
준은 오후 내내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일에 집중하는 척, 뭔가 바쁜 척, 자꾸 그런 척을 하게 되는 날이었다. 하린의 자리로 눈이 가는 걸 애써 눌렀고, 메신저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괜찮아요?’ 그 짧은 한 줄을 쓰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결국 보내지 않았다. 말이 더 깊은 균열을 만들까 봐, 말이 다시 무너뜨릴까 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핸드폰 상단에 떠 있는 이름, ‘지연’.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 답장해야 하는 줄은 알지만, 대화를 시작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제는 너무 가까웠고, 오늘은 너무 멀었다. 감정은 매일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걸, 그는 지금 가장 실감하고 있었다.
회의 중, 둘은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한 번쯤 고개를 들면 서로를 보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들지 않았다. “이건, 하린 씨 의견 들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누군가의 말에 준이 고개를 들었고, 하린은 당황하지 않은 척,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말끝이 살짝 떨린 걸 준은 들었고, 하린은 그런 자신의 말투를 스스로 모르는 척했다. 회의가 끝나고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마주치지 않았다. 엇갈림조차 조율된 듯 조용한 거리였다.
퇴근 후, 하린은 카페에 들렀다. 자주 가던 곳은 피했고, 일부러 조금 멀리 있는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노트북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했고, 커피를 마셨지만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하루 종일 말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했다. 사진첩을 무심코 넘기다 멈췄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밝게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낯선 얼굴. 지금은 누구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러나 완전히 지우지 못한 관계. ‘그때, 그 말을 했더라면.’ 그런 생각은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들었다. 마음속 어딘가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창밖을 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이건 오래 못 가.” 하지만 그 말도 진심이 아니었다. 오래가고 싶었던 마음이, 그 말속에 숨어 있었다.
준은 집에 돌아와 고양이 밥을 챙기고 소파에 앉았다. TV는 켰지만 아무 장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꾸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오늘 하루 동안 하린과의 거리를 수없이 계산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티 나지 않게. 하지만 그런 계산은 늘 감정을 더 부각시킨다. 조용히 말했다. “잘 지내는 척, 하는 것도 이제 좀 힘드네.” 고양이는 아무 말 없이 소파에서 몸을 말았다. 그 고요가 마음속까지 번졌다. 말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자꾸 입술 가까이로 몰려왔다.
그날 밤, 하린은 휴대폰 알람을 끄면서 문득 알림창을 열었다. 준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 알림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의 말은 기다리게 만들고, 또 다른 사람의 말은 받는 것조차 피하게 만든다. 같은 대화창, 다른 감정. 그 빈칸에 자꾸 마음이 쌓였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먼저 연락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 그 말에 대한 대답을 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말조차 이제는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보다 더 무서운 건, 그 말을 삼킨 침묵이었고, 그 침묵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준은 같은 시각,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은 꺼두었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고, 머릿속에서 하린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던 감정, 말하고 나면 사라질까 두려운 감정.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뭐였을까.’ 그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너무 쉽게 무너질 걸 알고 있었고,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무너질 걸 알았으니까 조심했다. 하지만 감정은 늘 조심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더 깊이 끌어안았고, 말이 없다는 이유로 그 마음이 덜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균형이란 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타이밍이 아니라 타이르지 못한 감정의 무게에서 시작되었다. 무게는 들리지 않았고, 결국엔 기울었다. 그들은 끝내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걸 걸었다는 걸 서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붙잡은 게 아니라 놓을 수 없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