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편 도로, 몇 분 차이로 도착한 준도 같은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익숙한 출근길을 잠깐 우회한 이유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어쩌면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린을 향한 감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아도, 그 감정이 그를 움직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춰 섰다.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이른 이 골목에서, 세상은 조금 더 느리게 흘렀고, 마음속에는 말이 되지 않은 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지금 이 조용함이, 마음이 움직이는 소리라면…’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날의 첫 마주침은 우연하지 않았다. 회의실 앞 복도,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희미하게 벽에 번지고, 복도에 난 창이 둘의 그림자를 아주 길게 늘여뜨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린이 먼저 말을 건넸고,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마디, 시선 한 번이 전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감정이 한 번 기울고 나면, 가장 단순한 인사가 가장 복잡해진다. 하린은 자신의 말투가 너무 밝았던 건 아닌지 걱정했고, 준은 대답이 너무 짧았던 건 아닌지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의 말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순간. 감정은 그렇게, 피로처럼 하루 전의 말들을 되감게 만든다.
점심시간, 오늘은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린은 도시락을 챙겨 조용히 사무실 옥상으로 올라갔고, 준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파일을 정리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서로의 움직임은 자꾸 감지됐다. 하린은 옥상 난간에 기대 도시락을 천천히 먹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란색이 단단하게 머물러 있었고, 그녀의 속은 복잡했다. 문득 사진첩을 열었다. 며칠 전 도산공원에서 찍었던 나뭇잎 사진, 흐릿하게 담긴 뒷모습 하나. 그 순간에 함께 있었던 기분이 고스란히 떠올랐고, 그녀는 화면을 조용히 껐다. 마음이 쉽게 흐려지지 않는 날이었다.
준은 책상에 앉아 메일을 쓰던 중, 문득 손이 멈췄다.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보며, 그 속에 어떤 문장을 넣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핸드폰을 들어 메신저를 열었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라는 문장이 입력되어 있었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결국 지웠다. 그 순간, 메신저 위로 또 하나의 알림이 떴다. ‘지연 – 오늘도 연락 없네…’ 그는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핸드폰을 뒤집었다. 무엇이 그를 더 무겁게 만드는지 알 수 없는 날이었다. 마음이 타오르는 건, 꼭 불길처럼 격렬해야만 하는 게 아니었다. 조용히, 스스로 타들어가는 방식도 있다는 걸 그는 요즘 실감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같은 회의실에서 있었지만,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이게 편하다고 믿는 쪽이 덜 아플까.’ 하린은 그렇게 생각했고, 준은 ‘말을 하지 않으면 지켜지는 감정도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믿음을 밀어낸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복도, 하린은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느끼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혼잣말을 흘렸다. “그만 흔들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말은 말할수록 마음을 더 흔들어 놓았다.
퇴근 후, 하린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걷기로 했다. 회사 근처 작은 서점을 둘러보다가, 오래전 함께 읽자고 했던 시집을 발견했다. 아직까지도 그 시의 첫 문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없는 하루는 처음부터 저물어 있었다.’ 책을 들었다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내려놓았다. 고르고 고른 말조차, 지금 이 감정 앞에서는 힘이 없었다.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을 때, 그녀는 또다시 휴대폰을 꺼냈고, 저장된 이름 하나를 눌렀다. 상대는 벨소리조차 울리지 않게 전화를 거절했다. 오래 만나왔지만, 이제는 의미가 흐려진 관계. 마음이 더 이상 머물지 못하는 곳.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그날 밤, 동네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퇴근 후 불 꺼진 집에 곧장 들어가는 대신, 차가운 캔맥주를 손에 쥐고 마음을 식히려 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밝게 웃으며 통화하는 목소리, 어딘가로 바쁘게 걷는 발소리. 그 안에서 그는 혼자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오늘은 일찍 잘 거야. 연락 마.’ 그 짧은 메시지를 읽고도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감정이 식는 건 끝에서 오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돌아보니 사라져 있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게 사라지는 사이, 다른 감정이 타오르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씻고 누운 뒤, 그는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불이 꺼진 아파트 단지와 가로등 사이로 고양이가 걷고 있었고, 그 고요한 풍경 안에서 자꾸 하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술을 열지 않아도 들리는 감정이 있다는 걸 그는 이제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며칠째,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불행이면, 왜 이렇게 따뜻하지…” 그 말은 방 안 어딘가에 머물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