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 끝이 있다는 걸 믿기 싫었어

by someformoflove

그 주 금요일, 둘은 서로를 피하지 않았지만 굳이 마주치지도 않았다. 메신저로 간단한 업무 지시를 주고받았고, 회의 중에도 필요한 말만 오갔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지 않았지만,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그렇게 금요일은 흘러갔다. 사무실을 나서며 하린은 짧게 고개를 숙였고, 준은 손을 한 번 들어 보였다. 말은 없었지만, 어쩌면 말보다 더 분명한 인사였다. 그 주말 내내, 둘은 서로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기로 한 건 아니었지만, 누가 먼저 움직이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준은 토요일 오전, 침대에 앉아 하린의 이름이 떠 있는 메신저 창을 천천히 내려보다가 화면을 껐다. 말 한 줄을 시작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그건 조용하지만 강력한 침묵이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고, 갑자기 양말을 신다 말고 다시 벗었다. 창밖엔 햇살이 가득했지만, 마음은 흐릿했다. 낮엔 커튼을 걷지도 않았고, 식사를 준비하다가 다시 포기했다. 고양이가 무릎 위에 올라왔지만, 손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하루,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하린도 같은 날 오후,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보고서를 쓰겠다는 건 핑계였다. 집중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자리를 만들어야 마음이 덜 흔들릴 것 같았다. 식어버린 커피, 깜빡이는 커서. 메신저에 떠 있는 ’준 (접속 중)’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메시지를 쓸까 하다 멈췄고, 보내지도 않은 문장을 몇 번이나 지웠다. ‘그냥, 오늘은 쉬자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은 끝내 오지 않았다. 감정이 흐르는 방향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닿고 싶다고 해서 닿는 것도 아니라는 걸 그녀는 점점 실감하고 있었다.

일요일은 더 느리게 흘렀다. 하린은 이불속에 오래 머물렀고, 씻지 않은 얼굴로 냉장고 문을 열다 이내 닫았다.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마감해야 할 보고서를 확인하러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노트북은 켜뒀지만 그대로였다.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은 조금씩 색을 바꾸고 있었다. 그녀는 도산공원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함께 걸었던 길, 마주 앉았던 카페, 말없이 앉았던 벤치—그 모든 것이 지금은 너무 생생했다.

카페를 나와 잠시 걷다, 문득 서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하린은 무심코 안으로 들어섰다. 특별히 사고 싶은 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문학 코너를 돌다 준이 예전에 추천해 줬던 시집을 발견했다. 함께 읽자고 했지만, 결국 각자 마음만 읽다 말았던 문장들. 책을 들었다가, 다시 꽂았다. 책장이 손끝에서 미끄러졌고, 조용한 책방 안에서 나는 작은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누군가 돌아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순간 마음속에 문장이 하나 맴돌았다. ‘우리는 같이 읽지 못한 문장을 너무 많이 쌓아버린 건 아닐까.’

일요일, 준은 평소보다 이르게 깼다. 계획은 없었지만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조깅복 차림으로 나와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없었고, 이어폰도 없이 바람 소리만 들었다. 강변을 따라 걷다 낯선 골목으로 들어섰고, 오래된 시장을 지나던 중 노부부가 함께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자리에 괜히 한참을 멈춰 섰다. 그들이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 어딘가가 찌그러진 듯했지만, 무슨 감정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문득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 창을 열었다. 하린의 이름이 떠 있는 대화창을 오래 바라보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화면을 껐다. 돌아오는 길, 예전 둘이 함께 웃었던 카페 앞을 지나쳤다. 들어갈까 망설이다, 문 손잡이만 한 번 잡고 놓았다. 그리고 그냥 돌아섰다.

월요일 아침, 다시 사무실. 둘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이전보다 더 멀어진 듯했다. 하린은 인사를 했고, 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익숙해져 버린 인사는 오히려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준은 하린 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하린은 더 말없이 움직였다. 둘 사이엔 말보다 더 묵직한 감정의 무게가 있었다. 오후, 하린은 프린터 앞에서 멈춰 섰다. 종이를 꺼내다 손이 멈췄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준이었다. “도와드릴까요?” 너무 일상적인 말투. 너무 평범한 문장이었다. “괜찮아요.” 하린은 그렇게 말했고, 둘의 시선이 짧게 스쳤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하린이었다.

그날 퇴근길, 하린은 오랜만에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답장이 오지 않은 대화창, 오랜만이라 먼저 말을 꺼내기도 애매한 이름. 아직은 지워지지 않은 흔적. 그녀는 대화창을 닫고 카메라 앱을 열었다. 창밖 풍경을 찍고, 그 안의 사람들을 오래 들여다봤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지치게 만들고 있는 걸까. 감정은 누군가에게서 오지만, 결국 자신 안에서 자란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친구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하린은 웃는 얼굴로 맞았다. 가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화는 리듬을 잃었다. 식사 중간,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하린아, 너 요즘 좀 이상해.” 하린은 숟가락을 잠시 내려놨다. “이상해?” “응. 뭔가 말 못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그냥 그런 느낌.” 하린은 웃었다. 물을 마셨고, 다시 웃었다. 이번엔 조금 힘이 빠진 웃음이었다. “말을 못 하니까, 그런가 봐.” 친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하린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 번지고, 하늘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냥… 너무 짧아서, 더 깊어진 게 있잖아. 그런 거 있거든.” 친구는 조용히 물었다. “그런 감정은, 오래가?” 하린은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응. 오래가더라. 잊고 싶을수록.”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워주는 게 아니라, 그저 옆에 있어주는 밤. 혼잣말보다 나은 고요함이었다.

그날 저녁, 준은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과 컵라면, 그리고 맥주 두 캔을 샀다. 혼자 마시는 소주에 익숙해진 줄 알았지만, 오늘은 맥주를 두 개 집었다. 하나는 열지 못한 채 가방에 넣었다. 조용한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술을 마셨다. 옆 테이블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거리엔 주말의 활기가 남아 있었다. 그 소리는 어딘지 불편했고, 스스로 그 안에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그 말은 작고 흐린 숨처럼 그의 입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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