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은 창밖을 오래 바라보다 메신저 앱을 열었다. 대화창을 누르지 않은 채, 미리 보기로만 내용을 읽었다. 마지막 대화는 ‘ 자료는 잘 받았습니다.’로 끝나 있었다. 불필요하게 예의 바른 말투, 그 문장 하나에 관계가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위아래로 밀었다. 뭐라도 써보고 싶었지만, 문장을 만드는 동안 마음이 몇 번이나 접혔다. 결국 핸드폰을 내려두고, 물을 한 컵 마셨다. 종이컵에 입술을 댄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준은 퇴근 후 회사 근처 서점에 들렀다. 특별히 사고 싶은 책은 없었지만, 무언가를 고르는 척 손가락을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소설 코너 앞에 멈춰 섰고, 책 등 사이에 낀 먼지들을 바라봤다. 오래된 책 특유의 종이 냄새가 났다. 그 사이로 하린이 예전에 추천해 줬던 작가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 책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그날 읽지 않기로 한 건 그 책이 아니라, 그 책을 고르던 마음이었다. 하린은 퇴근길에 혼자 카페에 들렀다. 자주 가던 곳은 피했고, 새로운 이름의 간판을 찾아 들어갔다. 자리를 고르다 유리창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긴 했지만 손은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지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준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고 알면서도, 그 얼굴이 아니라고 확인하면서도, 눈을 떼는 데에 몇 초가 더 걸렸다.
주말에는 친구를 만났고, 식당에 들어서며 ‘ 요즘 어때?’라는 질문을 들었다. 하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잘 지내’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다 이내 삼켜졌다. 말을 꺼내는 순간, 거기서 새어 나올 것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였다. 친구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곧 웃으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린은 그 대화의 흐름을 붙잡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거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커튼 사이로 불빛이 들어왔고, 그 안에서 핸드폰 화면이 흐릿하게 반짝였다. 대화창을 눌러 열었다. 말줄임표가 입력된 상태로, 그 위에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꺼버렸다. 준은 같은 밤,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음악을 틀었다. 가사를 듣지 않고 멜로디만 따라갔고, 재생목록은 스스로 넘어갔다. 하린의 이름을 몇 번이나 생각하다, 그 이름을 말로 내뱉지 못한 채 다시 맥주를 마셨다. 생각보다 쉽게 무뎌지지 않는 감정이 있다는 걸 그는 실감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사무실 복도에서 마주친 순간, 둘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말은 없었고, 인사도 없었지만 서로를 지나쳤다는 건 분명했다. 그렇게 지나친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고, 다시 반복되었고, 그 사이에 아무 말도 없었다. 사람들은 점심 약속을 잡고, 출장을 가고, 메일을 확인했고, 그들도 그 흐름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하린은 팀 회의 중 문득 준 쪽을 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앉아 있었고,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평소처럼 대답을 했지만, 그 어떤 표정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린뿐이었다. 준은 회의실에서 나가며 하린의 시선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선을 맞추는 건 그들에게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품었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그 주 내내, 둘은 서로에게 메시지를 쓰다 지웠고, 대화창을 열었다가 닫았고, 혼잣말로 몇 문장을 연습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잘 지내요?’, ‘요즘 어때요?’ 같은 문장은 시작부터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들 사이엔 안부가 아니었고, 궁금함이 아니었고, 확인도 아니었다. 오직, 다시 말을 시작할 수 없다는 확신만이 남아 있었다. 메신저엔 알림이 없었고, 마지막 대화는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커서가 멈춘 곳에서 아무도 문장을 완성하지 않았고, 그 미완의 문장이 감정보다 오래 남았다.
그리고 또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번의 주말이 흘렀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 보내지 않은 마음들, 닿지 못한 시선들. 그 모든 것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만 유지되고 있었다. 끝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가 남아 있는 척했고, 시작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은 미뤄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말하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가장 많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멀어졌지만 완전히 놓지 않은 감정, 멈췄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은 마음. 그들의 한 달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채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