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 전화번호는 그대로 있었지만

by someformoflove


준은 연락처 목록을 내리다 멈췄다. 그 이름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번호도 그대로였다. 누르지만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어쩌면 그건, 연락이 닿지 않는 게 아니라 애써 닿지 않는 척하는 마음의 구조일지도 몰랐다.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 그날도, 그 전날도, 지난주도. 고백도 사과도 아닌 말. 그냥 ‘괜찮은지’ 묻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말조차 꺼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그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린은 같은 시간,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음악은 흐르지 않았고, 사람들의 목소리만 배경처럼 들려왔다. 메신저를 열었고, 대화창을 넘기다 준의 이름을 보고 멈췄다. 오래된 말이 그대로 있었다. 사무적인 말투. 이모티콘 없는 문장. 그 무미한 대화가 아직까지 그녀를 잡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그녀는 천천히 창을 닫았다.

퇴근 후, 준은 오랜만에 지연과 저녁을 함께했다. 테이블 위엔 아직 반도 비우지 않은 와인잔이 있었고, 지연은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이야기를 조용히 꺼내고 있었다. 준은 몇 번 웃었고, 고개를 끄덕였고, 때로는 그 안에 없던 리액션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지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고, 대화가 끝난 후에도 귀엔 하린의 목소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현실 속 누군가의 말보다 더 생생했고, 잊으려 애쓸수록 자주 떠올랐다. 하린은 그 시각, 민재와 함께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 서로의 팔에 팔이 닿은 채, 긴 예고편이 흐르고 있었지만 스크린은 흐릿했고 마음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가 살짝 어깨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을 때, 하린은 웃었지만 그 웃음은 어디서부터 나온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준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지연과 몇 마디나 했는지’를 세어보려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고, 그런 걸 굳이 헤아릴 정도로 마음은 허전했다. 집에 도착하자 고양이가 현관으로 다가왔고, 그는 고양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잘 지냈어?” 고양이는 아무 대답 없이 꼬리를 감았고, 그 조용한 반응이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린은 민재와 헤어진 뒤 카페에 들렀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혼자였던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준에게 보낼 말을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요즘은 어때요?” “그냥, 잘 지내요?” 같은 문장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고, 그 말들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오히려 진심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 주 금요일, 둘은 회사 복도에서 마주쳤다. 말은 없었고, 눈빛도 스치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정이 요동쳤다. 하린은 잠깐 준의 옆을 지나며 숨을 참았고, 준은 하린의 실루엣이 사라진 뒤에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회의실 유리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가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 몰랐다. 점심시간, 하린은 다른 팀과 함께 나갔고, 준은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 도시락을 데우는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봤고, 메시지를 쓰는 척하며 이름을 눌렀다. 그러다 아무 말도 쓰지 않고 화면을 닫았다. 그날 하린은 오후 내내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지만, 마음속은 조용했다. 누군가 ‘요즘 잘 지내요?’라고 묻자, 그녀는 한 박자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데엔 아주 작은 저항이 있었다.

준은 주말 동안 핸드폰을 멀리했다. 충전을 하지 않았고, 침대 옆에 두지도 않았다. 대신 책을 펼쳐 들었고, 음악을 들었고, 가끔은 아무 소리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장면에서 하린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이 장면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말을 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 책장을 덮었다. 하린은 민재의 연락을 일부러 몇 시간 뒤에야 확인했다. 데이트를 미뤘고,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 그녀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커튼을 걷지 않은 방 안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던 건 아니다. 그냥 말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아무 말도, 누구에게도.

그리고 다시 월요일. 준은 출근길에 버스를 타고 창밖을 봤다. 풍경은 매일 같았고, 날씨도 특별할 것 없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었다. 누군가에게 다녀온 듯한 감정, 어디에선가 빠져나온 듯한 기분. 핸드폰을 켰고, 메시지를 쓰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잘 지내요?’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그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너무 늦은 안부이자, 너무 이른 후회다. 결국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린은 아침 회의가 끝난 후, 복도로 나와 핸드폰을 꺼냈다. 메시지함을 열어보았고, 새로 도착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준의 이름을 눌렀다. 그리고 화면을 켠 채 가만히 있었다. 그저 이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말이 오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착각은 아무 말도 대신해주지 않았다. 이름이 있는 번호. 번호가 있는 대화창. 그 모든 것이 살아 있지만, 감정은 묻혀 있는 것 같았다.

전화번호는 그대로 있었고, 이름도 바뀌지 않았고, 마지막 대화도 지워지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의 모든 문장이 비워진 채였다. 서로는 여전히 서로를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 그 틈에서 마음은 멈춰 있었고, 아무도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 감정이 남아 있는 건 분명했지만, 그 감정이 어디로 가야 할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른다는 사실만이,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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