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 설명이 필요한 밤

by someformoflove

하린은 민재와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조용한 정식집에 앉았고, 반찬이 하나둘 차려졌다. 민재는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고,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웃음소리는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는 마음까지 닿지 않았다. 창밖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고, 수저는 자주 머뭇거렸다. 민재는 눈치챘을까. 눈치챘더라도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갑자기 아쉬워졌다. 알아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아줘야 할 것 같은 마음. 예전에 준과 함께 있을 때는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안심이 되었다. 말로 전달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고, 오히려 그 침묵이 편안한 기류를 만들었다. 지금은, 계속 말해야만 유지되는 관계 같았다. 설명이 필요한 사이. 그녀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지쳐가고 있었다.

준은 퇴근길에 지연과 통화 중이었다. 지연은 다음 주 일정과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응’, ‘그래’, ‘그랬구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연의 말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화가 아니라 단어를 보내고 있는 기분. 예전에는 이 말투가 자연스러웠는데, 요즘은 그 안에 어색함이 자꾸 묻어났다. “듣고 있어?”라는 질문에 그는 “응, 듣고 있었어”라고 대답했지만, 동시에 떠오른 건 하린의 눈이었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도 많은 걸 담고 있는, 그런 눈. 그녀와의 대화는 단어보다 여백이 많았고, 그 여백이 오히려 감정을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지금은 말이 많지만, 말이 닿지 않는 시간 속에 있다.

하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 한 캔을 샀다. 차가운 알루미늄 표면이 손끝에 닿을 때, 하루 동안 눌러뒀던 감정이 조금씩 스며 나왔다. 집에 도착해 불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맥주를 마시며 메신저를 열었다. 대화창 목록 아래쪽에 여전히 있는 ‘그 이름’을 눌러보지도 않은 채 바라봤다. 메시지를 쓰지는 않았고, 커서를 올려놓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요즘은 어때요?” 같은 문장이 떠오르다, 아무 말 없이 꺼졌다. 그 문장을 꺼내는 순간, 진심이 가벼워질까 봐. 무거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다시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화면을 껐다.

준은 오랜만에 야근을 피했다. 일부러 빠르게 일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기 전, 그는 하린의 프로필을 눌렀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상태 메시지도, 사진도, 대화도 그대로였다. 변화는 하린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미 대화가 시작됐을 시간. 하지만 지금은, 그 대화의 첫 줄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말은 여전히 가능했지만, 마음은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준은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안녕하신가영의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이 흘러나왔고, 준은 그 소리에 기댔다.

토요일, 하린은 민재와 보기로 했던 영화를 취소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고, 설명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았다. 노트북은 켜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커피는 식었고,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만 길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가벼운 웃음소리, 가을 햇빛.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도 머물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오후. 민재는 별다른 말 없이 대화를 끝냈다. 그게 편하면서도 서운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편한 동시에, 아무도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늘했다. 준과 함께 있을 때는 반대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 말하기 전에 눈치채주는 감각. 그녀는 그걸 다시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준은 주말 내내 고양이와 함께 있었다. 집 안에 햇살이 길게 드리웠고, 고양이는 조용히 그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거실 바닥에 앉아 책을 꺼냈다. 집중은 오래가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다 하린이 떠올랐고, 손이 멈췄다. 그녀는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어떤 문장에서 멈춰 설까. 페이지를 덮고,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어떻게 멀어지게 된 걸까.’ 정확한 계기를 떠올릴 수 없었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멀어졌다는 감각은 선명했다.

일요일 밤, 하린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불은 꺼두었고,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아주 작고, 아주 오래된 바람. 감정이 새어나가는 틈이 생긴 듯한 기분. 그녀는 눈을 감았고, 갑작스레 울컥했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눈물은 조용히 흘러내렸다. 모른 척하고 있었던 마음들이, 더는 감춰지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입술을 꼭 다물었다. 소리를 내면 감정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 아주 작게 무너졌다. 그리고 그 틈에서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마음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준은 그 시간, 메신저를 또 열었다. 하린의 이름을 누르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봤다. 커서는 비어 있는 창 위에서 깜빡였다. 그는 문장을 쓰려다 멈췄다. ‘요즘은 어때요’조차 꺼내지 못했다. 말 한 줄이 너무 많은 걸 건드릴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떨궜고, 화면을 닫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밤은 조용했고, 그 안에서 생각했다. ‘이렇게 같은 시간에, 누군가도 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을까.’ 그 상상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위로처럼 느껴졌고, 그 위로는 곧 깊은 외로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고, 처음으로 아주 작게 결심했다. ‘내가 먼저,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마음이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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