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 다시, ‘우리’는 없다고 말해줘

by someformoflove


하린은 퇴근길에 문득 버스를 타지 않았다.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없었지만, 멈춰 있는 공간보다는 어디든 향하고 싶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거리엔 잔빛이 엉켜 있었고, 사람들은 이어폰을 낀 채 제각기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소음을 듣고 싶었다. 말들이 스쳐 지나가고, 타인의 감정이 엉켜 있는 혼잡한 공기 속에 조용히 묻히고 싶었다. 사무실 책상 위에 남겨둔 파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민재에게 보낸 메시지도 이미 읽힘 표시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감정이 없었다. 무감각이 무관심으로 변해가는 경계에 서 있는 기분. 창 너머 ‘우리’라는 글자가 쓰인 오래된 포스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시, 우리일 수 있을까. 하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준은 지연과 저녁을 먹었다. 말이 오가긴 했지만, 정작 대화는 없었다. 지연이 조용히 말했다. “요즘, 나한테 말이 없어.”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에 대답할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그는 처음으로 인정했다. 대화는 씹히지 않은 채 삼켜졌고, 공기는 끝내 식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남았다. 돌아오는 길, 그는 혼자 카페에 들렀다. 조용한 구석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하린의 이름을 눌렀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단 네 글자를 쓰다 지웠다. 그 문장이 너무 늦은 인사처럼, 혹은 감정의 무게를 얕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주말, 하린은 민재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보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했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한 관계가 된다는 건, 감정이 멀어졌다는 증거였다. 민재를 마주하는 일이 점점 피로해지고 있었다. 반면, 말없이 스쳐 지나간 하루 속에서도 준의 얼굴은 불쑥 떠오르곤 했다.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었고,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 물기를 따라 그리다 멈췄다. 흩어진 물결처럼 번지는 기억. “우리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하지 않아서 멀어진 건지, 멀어졌기에 말하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준은 그 시간, 천천히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예전에 하린과 함께 걷던 거리였다. 그날 그녀가 문득 멈춰 섰던 자리에 그는 멈췄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변했지만, 풍경은 거의 그대로였다. 그 자리의 공기를 다시 마시자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그 한마디가 가슴 안에서 울렸다. 너무 많은 말을 쌓기 전에, 하나쯤 꺼냈어야 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하린의 이름을 눌렀다. 예전에 써두었던 문장 하나를 다시 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이번에도 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문장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조용히 움직였다.

밤이 되었다. 하린은 침대에 누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았고, 음악도 틀지 않았다. 민재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메시지는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보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답장을 보내기엔 마음이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민재와의 관계는 더 이상 기대를 요구하지 않았고, 하린은 그 안에 자신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아닌, 자꾸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민재와의 침묵은 처음엔 배려였지만, 지금은 그 안에 모든 것이 묻혀버린 결과였다. 말하지 않는 건 더 이상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감정이 거기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 시각, 준 역시 어둠 속에 있었다. 방 안엔 고양이의 숨소리만 잔잔히 들려왔다. 그는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지연과의 대화, 건너뛴 말들, 피한 시선. 모든 게 쌓여 있었다.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말들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았다. 반면, 하린을 생각할 때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했고, 그 고요 안에 감정이 살아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던 그 감정. 그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다만 닿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둘은 동시에 핸드폰을 들었다. 하린은 ‘최근 대화’ 탭에서 그의 이름을 눌렀고, 준은 미리 써뒀던 문장을 다시 열었다.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지금 말하면 무너질 것 같은 그 감정이, 더는 안으로 감출 수 없다는 것도. 그것이 고백이 될 수 없고, 시작이 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는 것도. ‘우리’라는 말이 붙던 시간은 아직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말을 쓸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는 걸 조용히 받아들인 밤. 서로가 서로를 끝낸 게 아니라, 더는 붙잡지 않기로 잠시 멈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는 끝나지 않은 채 멈췄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켜온 것들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닿을 수 없게 된 밤.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감정을 끝내기엔 너무 많은 마음이 남아 있던 순간이었다. 말은 없었지만 침묵은 이미 서로를 지나친 마음의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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