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을 묻는 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팀장의 말은 이미 끝났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몇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두 마디를 말했다. 누가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끝난 후 다시 공기가 흐려졌다. 회의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고, 의자들이 닿는 소리만 사각사각 이어졌다.
하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리된 종이 위로 손가락이 잠시 머물렀다. 나갈 타이밍은 이미 지나 있었다. 창밖으론 누군가 우산을 접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손끝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휴대폰을 켜 보니 어머니에게서 ‘감기 조심해’라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하트 이모티콘 하나가 덧붙어 있었다. 하린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답장 대신, 단어 하나를 입력하다 지웠다. 그녀는 오늘 하루를 길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길게 대화하지도,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무게를 그냥 가지고 있고 싶었다.
그 시각, 준은 복도 끝에서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회의실 유리 벽 너머로 비치는 조명이 하린의 어깨를 희미하게 감쌌다. 무채색 블라우스, 깊게 감긴 머리끈, 그리고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 그러나 그 정적 안에서 어딘가 놓여진 것 같지 않은 모습. 준은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말없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시선을 들고, 커튼을 젖히고, 서서히 문 쪽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까지. 둘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였지만, 발걸음을 옮기기엔 어색한 간격이었다.
엘리베이터 앞, 둘은 동시에 섰다. 작은 정전기가 어깨에 스쳤고, 문이 열리기까지의 짧은 정적이 길게 느껴졌다. 누가 먼저 버튼을 누를까 고민하는 틈도 없이,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 안은 차가웠고, 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엘리베이터 안, 하린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만졌다. 습기 때문인지 이마 옆 머리카락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준은 자신의 셔츠 커프스를 정리하며 목덜미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침묵은 아무 대화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하린은 자리에 앉았다. 책상이 어수선했다. 전날 야근 후 그대로 두고 퇴근한 탓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포스트잇, 캔커피, 닫히지 않은 노트.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공간에 고스란히 드러난 느낌이었다. 그녀는 얇은 노트북 화면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화면 안에서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퇴근 무렵. 준은 그녀가 외투를 챙기는 모습을 봤다. 바닥에 떨어진 이어폰을 줍고, 긴 코트를 천천히 입는 동작.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따라나섰다. 우산을 펴자, 비가 더 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회사 앞 골목에서 하린이 멈췄고, 뒤를 돌자 준도 멈췄다. 말없이 마주 본 눈빛. 그녀가 말했다.
“혹시, 맥주 한 잔… 괜찮을까요.”
그 말은 의외였고, 동시에 아주 오래 기다렸던 말 같았다. 준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찾은 곳은 오래된 식당이었다. 젖은 옷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고, 그 물자국이 바닥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가게 안은 따뜻했지만 공기는 무겁게 눌려 있었다. 창가 테이블, 반쯤 흐려진 유리창. 두 사람은 벽 쪽에 나란히 앉았다. 그 구조가 어쩐지 말하기 좋았고, 어쩐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게 느껴졌다. 맥주 한 병, 컵 두 개. 하린은 손끝으로 천천히 병을 잡았다. 술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을 작게 흔들었다. 준은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하린도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마주한 잔, 식어가는 맥주, 눅눅한 냅킨과 물기 맺힌 메뉴판—모든 것이 정적 속에서 오래 묵은 감정처럼 고여 있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은 짧게 스치고는 빠르게 돌아섰다. 마치, 그 눈빛 속에 감춰진 무언가가 너무 쉽게 드러날까 두려운 듯.
하린이 입을 열었다.
“…조금, 숨이 막혀요.”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온도였다. 말하지 않아서 더 크게 요동치는 마음이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감정이 식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서, 더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말 대신 쌓인 것들이 너무 많았고, 말로 꺼낸다고 해서 다 가벼워질 것 같지도 않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타이밍에. 준이 계산을 했고, 하린은 조용히 외투를 들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 감정이 무너지거나, 쏟아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게를 나서며 우산은 쓰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은 어디든 걸어야 했다. 마음이 뛴 방향으로, 조용한 골목을 따라. 젖은 공기와 다 마르지 않은 바닥, 그리고 말하지 못한 감정이 따라오는 발걸음. 둘은 나란히 걸었다. 그날 밤, 그 조용한 거리 위에서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뛰기 시작한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