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쳤지만, 바닥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 조용히 번졌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머리칼에 바람이 얹혔고, 젖은 공기 속에서 마음은 조금씩 더 무거워졌다. 걸음은 느렸고, 어딘가로 향한다기보다는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린은 말을 삼켰다. 목울대까지 올라온 말이 있었지만, 그 끝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세요?" 그 한 줄. 머릿속에서는 수십 번이나 반복했는데, 입에서는 도무지 꺼낼 수가 없었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질까 봐. 아니, 모든 게 너무 선명해질까 봐. 감정을 말로 옮기면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더 무거워질 것만 같았다.
준 역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문장이 완성됐다가, 이내 허물어졌다. "나는 아직도 네가 그날 입었던 옷을 기억해." 그런 문장이었다. 너무 사적인가, 너무 멀리 갔나. 그건 그냥 기억이었을 뿐인데, 말로 옮기는 순간 감정처럼 들릴까 봐. 그는 옆을 힐끔 봤다. 하린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손은 주머니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어깨가 조금 떨렸다. 춥진 않은 밤이었다.
하린은 문득 생각했다. ‘내 감정을 이야기해도 될까?’ 그건 허락이 필요한 질문 같았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자꾸 묻게 되는 질문. 이걸 감추는 게 더 괴로운데, 왜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걸까. 그녀는 속으로만 수없이 중얼거렸다. “나 사실, 그날 이후에 당신 생각을 매일 해요.” 이런 말. 너무 가볍게 들릴까 봐, 너무 무겁게 남을까 봐, 말이 안 됐고, 그래서 삼켰다.
준은 하린의 걸음을 맞췄다. 일부러 맞춘 것도, 의식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발끝의 간격이 자꾸 일치했다. 사람은 마음이 닿는 거리만큼 걸음도 닮아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그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편의점 앞을 지나던 중, 하린이 멈췄다. 준도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둘 다 말할 뻔했다. 하지만 서로 동시에 입술을 열지 않아, 말은 흩어졌다.
“맥주 한 캔, 괜찮아요?” 하린이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게 필요했던 것 같네요.”
편의점 안, 그들은 각각 다른 맥주를 골랐다. 서로가 무엇을 집었는지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뭇잎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천천히 흔들렸다. 벤치 위, 하린이 먼저 캔을 열었다. 소리가 작게 터졌다.
준도 캔을 열며 말했다. “오늘은 말이 어려운 날이네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마음은 너무 시끄러운데.”
둘은 동시에 웃었다. 짧고 조용한 웃음. 그건 무언가를 포기한 웃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웃음도 아니었다. 그냥 그 밤을 견디기 위한 작은 숨 같은 웃음.
하린은 다시 말했다. “가끔은, 내 감정이 나도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건지, 그냥 그리운 건지.”
준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럴 때는 그냥… 계속 걷는 거죠. 멈추지 말고. 감정이 어디로 가는지 보이게 될 때까지.”
그 말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따뜻했지만, 그 안에 슬픔이 있었다. 마치 ‘당신이 이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걸, 난 오래 생각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캔 맥주는 점점 미지근해졌고, 마음은 점점 더 고요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말을 속으로 삼킨 밤이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가까운 거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하린은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캔을 내려두었다. “조금만 더 걸을래요?”
준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공원에는 여전히 가로등 불빛이 잔잔했고, 바람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걸었다.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그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린이 멈췄다. 눈앞엔 오래된 호텔 간판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걷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천천히 그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그건 말보다 먼저 흐른 감정이 이미 알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