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 우리가 조용히 부서지던 순간

by someformoflove


호텔방 안, 형광등이 켜지자 공간은 차갑게 밝아졌다. 문이 닫히고, 열쇠 카드가 천천히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무언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고요가 방 안을 채웠다. 둘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옷에 묻은 습기와 밖에서 묻어온 냄새들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로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하린은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올려두었고, 준은 컵 두 개를 꺼내 물을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잠시 멈췄다.

창밖은 어두웠다. 도심의 빛이 바닥에 반사되고 있었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흐릿하게 유리창을 스쳤다. 커튼은 절반쯤 열린 채로 흔들렸다. 하린은 그 커튼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밤,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준도 그녀가 바라보는 창밖을 따라 보았다.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떠오르는 감정은 다르지 않았다.

말을 꺼낼 타이밍은 몇 번 있었지만, 둘 다 놓쳤다. 아니, 일부러 놓쳤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말을 하는 순간, 무언가가 되돌릴 수 없이 바뀔 것 같았다. 감정은 입 밖으로 나올 때 비로소 그 무게를 가진다는 걸,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린은 조용히 앉아 다리를 모은 채 손끝으로 컵을 잡았다. 입술을 대지 않고, 컵의 가장자리만 만지고 있었다. 준은 침대 끝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었다. 손은 무릎 위에서 가만히 얹어져 있었지만,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서로의 그림자가 겹쳤다 흩어졌다.



하린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거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우리… 그냥 여기까지만 해도 돼요.”

그 말은 끝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끝을 생각하는 말처럼 들렸다.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보다 눈이 먼저 움직였고, 그 눈은 하린의 옆모습에 멈췄다.
“왜요?”
한참 만에 그가 말했다. 너무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엔 수많은 의미가 들어 있었다.
왜 지금 말하는지, 왜 지금 그 말을 택했는지, 왜 하필 오늘인지를 묻고 있었다.

하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 사실…”
그 말은 거기서 멈췄다. 이어서 나올 말들이 있었지만, 전부 말해지는 순간 이 공간이 감정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 걸 택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남아 있는 감정을 지키는 방식.

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완전히 젖히고, 창 앞에 섰다. 빛이 그의 어깨를 감쌌고, 그림자가 유리에 번졌다. 하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질문도 없고, 대답도 없었지만, 감정은 명확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건 말보다 더 선명한 무언가였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린이 말했다. “내가 느끼는 게 뭔지.”


준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모르겠다는 건, 있다는 거죠.”

그 말은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거의 숨결 같았다.
그 숨결이 방 안을 조용히 채웠고, 침묵은 그 위에 얹혔다.

그 순간, 서로가 다가가지 않아도 방 안의 공기는 가까워졌다.
감정은 더는 감춰지지 않았고, 더 감출 이유도 없었다.

그날 밤, 그들은 창밖을 마주 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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