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인생에는 누구나 무수한 지뢰밭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세상에 내놓아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이제야 비로소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게 되었다.
또한, 5년전 느닷없이 시작된 생산직근로자로서의 삶의 경험이 마침내 나를 요양보호사가 되게 했음을 확신한다.
그 5년여의 시간을 나는 브런치에 한없이 낯설지만 그럼에도 일단 들어선 이상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럼에도 가도가도 끝없는 비포장도로처럼 느껴지던 생산직 근로자로서의 하루하루를 기록했다.
그 시간동안 실업급여의 혜택을 받았으며, 결핵감염과 치료의 과정을 겪었으며 손목골절로 인한 산재휴가를 받고 무노동유임금의 달콤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실, 지난해 말즈음 얼덜결에 생산직의 비포장도로를 벗어나는 진출로 혹은 돌파구 삼아 발을 담갔던 보험설계사의 세계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야바위와 같이 느껴졌다.
그 매일매일의 야바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존재하는 보험설계사들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몇달간의 보험사무실에서의 경험은 다시 나를 생산직근로의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가장 정직하게,자신이 흘린 땀방울의 무게와 가치만큼의 대가만을 바라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그 야바위의 세계를 탈출할 방법을 탐색했다.
허나, 배운게 도둑질이라던가 전업작가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면 내가 경험했던 생산직노동만이 나의 차선책일 뿐인 듯했다.
연말즈음부터 나는 다시 워크넷을 뒤적였다.
무수한 탐색과 시도끝에 집에 멀지 않은 곳의 세탁공장에 들어갔다.
세탁공장이라, 대충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인간이 빨래를 직접하는 것은 아니고 기계를 통해 세탁되어 나오는 세탁물을 말 그대로 정리정돈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주택가의 세탁소가 그 축소판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세탁공장에 들어오는 세탁물은 주로 사업체, 그중에서도 호텔에서 사용하는 타월류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호텔업이 성황을 이루는 시절이 되면서, 수백 곳의 호텔들에서 하루에도 수십 수백 장씩 쏟아져나오는 타월이나 침대시트와 이불커버 커튼 등등의 세탁물이 세탁공장의 세탁대상물이다.
아, 수건쯤 접는것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싶어 지원했더니 곧바로 취업이 됐다.
올해 1월첫날부터 출근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참 쉬운일, 가능하면 오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며칠 지나기도 전에 생각지 못한 아주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루일과가 끝나면 옷과 머리에 뽀얀 먼지들이 쌓였고, 당연히 마스크를 쓰고 일하지만 마스크를 한시도 벗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음으로는 세탁기계를 통해 나온 세탁물이 수백 수천장씩 쌓인 카트를 작업대로 끌고와 그 카트에서 작업대위로 수건들을 쏟아붓는일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두번째 암초였다.
생산직의 특성상, 이곳에서도 빨리빨리가 원칙이다. 그러다보니 타월들을 한장씩 끌어낼 수는 없다. 그러다보니 양쪽 팔뚝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2주정도 되었을 때 나는 백기를 들기로 결심했고, 3주만에 그곳을 떠났다.
쓸어도 쓸어도 끝없이 매일매일 세탁물의 양만큼 새로 생산되는 엄청난 먼지와 팔뚝의 통증을 오래 견딜 자신이 없었다.
당시 짧은 기간 함께 일한 동료들은 몹시 아쉬워했다. 일도 잘 하고 젊은데 그만 둔다니 아쉽다며.
그곳 근로자의 평균연령은 65세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나이가 많아서 다른 생산직에는 갈 수 없는 여자-할머니들이 그곳에 모두 모인 듯 했다. 드물게 내 나이대가 몇 있었으나 거의가 노년이었다.
그나마 나이가 그렇게 들었어도 팔다리 성하고 근력도 있어서 노동력이 인정되는 노년들에게만 허락되는 소중한 일자리였다. 그분들은 다른 데는 갈 수도 없고 그나마 나이 많은 늙은이를 써주니 그저 고맙다는 생각으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먼지따위, 조금 힘든 것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마음자세가 충분한 이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이기적이고 까탈스럽고 용의주도한 인간인 셈이었다. 그러나 어쩔수 없었다.
나역시 그 마음씨 좋은 할머니들과 더이상 함께 일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나는 나의 길을 가야했다.
그후 나는 다시 새로운 공장에 들어갔다.
도시락 소분업체였다.
내 자식이 먹어도, 그 누가 먹어도 자신있는 건강식품을 제조한다는 신념으로 사업한다는, 사장이 이번에도 나를 잘 봐서 면접당일에도 거의 채용이 결정된 느낌을 받았었다.
나는 기뻤다. 요즘 인기있는 인스턴트 메뉴인 도시락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니!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열심히 즐겁게 일해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시작한 도시락공장은 그러나,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도시락이란게, 다들 한번쯤 먹어본 경험상 서너가지 반찬과 밥이 기본구성이다. 그 구성을 위해 준비되는 식재료는 모두 냉동인스턴트 식품이라는 사실을 출근한 첫날에야 구체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아, 그렇지....냉동식품이구나.
꽝꽝 냉동된 동그랑땡과 냉동 계란말이와 볶은냉동김치와 냉동채소와 냉동밥....모두 어느 다른 1차 식재료 가공업체들에서 조리되어 나온, 꽁꽁 얼린 구성품을 사들여 이곳에서는 칸칸이 나뉜 도시락용기에 몇 알씩 총중량에 맞게 소분을 하는 것이다.
이곳역시 빨리빨리 많이 만들어 내보내야 하기에 모든 생산자들은 컨베이어벨트 양쪽으로 늘어선 채 제몫의 빈칸에 하루종일 무한반복, 반찬을 밥을 적정량씩 재빠른 손동작으로 덜어넣어야 했다.
작업 자체는 단순하고 간단했다.
냉동 동그랑땡을 장갑낀 손으로 집어 넣다보니 손끝이 시려웠다.
켄베이어 벨트는 너무 빠르게 내 앞을 지나갔다.
아차하면 저 앞으로 가버리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열심히 내 앞을 지나는 도시락의 빈칸에 동그랑땡을 냉동 볶은김치를....넣었다. 그러다가도 자칫하면 빈 칸으로 보내기 일쑤였고 도시락을 엎어 쏟아버리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로 실링기를 통과하며 위부분에 비닐막이 씌워지면 완성이다.
그 첫날부터 나는 자괴감에 빠졌다.
예전 비타민공장에서도 컨베이어앞에서 일해보기도 했으나 이곳의 컨베이어는 어찌나 빠른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보다도 첫날부터 나를 갈구듯, 나의 어설픈 동작을 트집잡고 잔소리하는 부팀장(?)급의 그녀는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로부터, 나와 동갑인 그녀는 거의 2주동안 매일, 나를 앞에 두고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거나, 'OO씨가 제대로 못 넣으시니 제가 너무 힘들잖아요' 식의 말을 커다란 소리로 하면서 나의 실수를 부각시키며, 조금만 버벅거려도 꼬투리잡듯 잊지 않고 한마디씩 뱉었는데, 그때마다 마치 가슴에 칼이 꽂히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그 벨트 앞에만 서면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가?하는 회의마저 들었다.
지난 4~5년동안 여러 생산직을 돌아다녔지만, 적어도 나라는 인간이 쓸모없게 느껴진 적은 없었기에 나는 뜻밖에도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어처구니없게도 날마다 눈물을 쏟았다.
물론 그녀 앞에서는 태연한 척 했으나 집에 오는 길이면 자괴감과 모욕감, 분한 감정이 함께 치밀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