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입사의 추억
"앞으로 면접 약속 몇 개 더 있어요? 조이조씨가 적은 희망연봉보다 200 더 줄테니까, 다른 데 면접 보지 말고 그냥 우리 회사 다녀요."
그렇게 입사를 하게 되었다.
나를 알아주는 회사.
내가 바라던 제 1 조건이었다.
다른 고민 없이 그 자리에 알겠다 말하고 예정되었던 면접 약속을 모두 취소하였다.
그리고 면접을 본 다음 날 바로 출근을 했다.
매년 정해진 월에 구인을 하고 몇 기라는 수식이 붙는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기업은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채용을 한다. 그리고 면접을 보고 나서는 가능한 빠른 출근을 원한다.
중소기업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회사는 면접을 보고 다음 날 혹은 바로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면접을 본 직후부터 일하는 직원들도 보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상대방의 자세를 보려는 무례한 사고방식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가능한 회사의 방침에 따르고 싶었다.
나의 역량을 인정받아 이 곳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사회인으로서의 나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나의 기대보다도 얹어진 것은 연봉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파트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직원들에게 소개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회사는 직급에 야박했다. 대리도 주임으로 낮춰서 채용이 되고 진급도 중소기업 치고 더딘 곳이었다. 게다가 파트장 자리에 대한 사장님 철학이 있어서 오래 일한 직원에게도 내어주지 않다가 뜬금없이 내게 감투를 씌운 것이다.
모두 친절했지만 어쩐 지 나는 경계를 느꼈다.
내가 입사하고 이 주 뒤, 같은 팀에서 오래도록 근무했던 동갑내기 남자직원이 퇴사하였다. 그는 다정하게도 내게 내 탓이 아니라 회사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퇴사라 했지만 사장님은 두고 두고 '조이조 입사하자마자 한 명 내보냈잖아.'라고 회자했다.
그럴 수록 더욱이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업무 능력과 리더쉽에 대한 강박으로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술자리를 가졌다. 점점 살이 찌고 새치가 늘어갔지만 삼십대 초반의 사회생활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있을 때 함께 웃고, 모두 퇴근 한 뒤 혼자 숨죽여 울며 일을 했다.
이직하고 초반의 업무처리는 탐정놀이와 같았다.
나이 먹고 이직하는 것이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래서 가능한 이 곳이 나의 마지막 직장생활이길 바랬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