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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Oct 31. 2022

정진호 수필 1






  1.

  삶(生)은 일종의 꿈(夢)이다. 꿈속에서 쥐고 있던 모든 것이 깨어난 순간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듯 내 삶도 그럴 것이다. 가진 것과 기쁨은 물론 가지지 못한 것과 슬픔까지도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여기에 있는 것은 종국엔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비좁은 담장 밑으로 겨우 들어간 너른 포도밭에서 아무리 많은 포도를 먹어봤자 결국 그곳을 나오기 위해선 다시 배를 비워야 하는 것처럼. 나는 뱃속에 가득 찬 것들을 비워내듯 시도 때도 없이 같은 생각을 되새김질한다.     

 

 “세계는 환(幻)이고 사는 것은 꿈꾸는 것이다.”


  근래 나는 수개월 동안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다. 언제나 이유야 있었겠지만, 결론적으로 무엇도 쓰지 못했다는 것은 나를 계속해서 괴롭혀 왔다. 숨이 턱 막히고 괜히 서러웠다. 나는 재능이 없었고, 어리석은 곳에 시간이나 축내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재능이 없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실제로 그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나는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다. 그전에 썼던 글들은 역겨웠다. 그런 난국은 얼마간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그럴 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뇌이었다.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사내는 글을 쓰지 못하는 그런 꿈. 과거에는 무언가 썼을 테지만 지금은 무엇도 쓰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왜 쓰기 시작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애당초 그런 건 없다. 단지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지 꽤 되었다는 상황과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는 상황만 마주하고 있는 거다. 나는 멍청하게 키보드 앞에 앉아있다. 임의의 좌절감과 절망감을 지우지 못한 채 막연하게 앉아있다. 무엇도 나를 붙잡고 옭아맨 적 없으나 꼭 그런 상태인 것처럼 나는 의자에서 꼼짝 못 한 채 앉아있다. 글을 관두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저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꿈이고, 어떤 것도 나를 억누른 적 없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그 의자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떤 것도 나를 막지 않았고, 나는 기이하게 스스로 괴롭히고 있는 순간을 가뿐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고통은 가장 사랑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고, 자유는 가장 집착하는 것을 가뿐하게 짓밟을 때 오는 것이라고. 이곳이 온통 꿈이라는 생각은 툭하면 니힐리즘에 빠지는 사춘기 시절과 달리 내게 자유로움을 주곤 한다. 이를테면, 나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릴 자유.



  2.

  한 번 그런 생각을 친구에게 꺼내놓은 적 있다.

  이번 생의 내가 지난 생의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번 생 역시 다음 생의 내게 전혀 기억되지 않을 꿈이 될 거라고. 무엇에도 유난스레 매달릴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내게는 큰 위로가 된다고.

  정말 이 모든 게 꿈이라면 당장 부엌칼로 너를 난도질해도 되냐는 친구의 반응은 나를 당혹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는 이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인 것처럼 분개했다. 얼큰하게 취한 그는 내 얼굴 앞에 위협적으로 삿대질을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이교도를 마주한 교리주의자(敎理主義者)의 얼굴이었다. 마치 순교자 스테판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처럼, 그는 이교도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귀를 치며 입으로는 큰소리를 내질렀고, 이교도의 입을 막기 위해 삿대질과 돌팔매질을 서슴지 않은 꼴이었다. 그에게 이곳은 반드시 ‘현실’이어야 했다. 꿈과 현실이라는 단어는 철저하게 구분되어야 했다.

  “말해봐, 지금 죽여줘? 깨어나는지 볼래?”

  그에게 현실은 말 그대로 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이었다. 꿈과 현실. 그에게 있어서 두 개념의 관계에는 절대적이고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꿈과 현실이란 차가움과 따뜻함처럼 정도에 따라 양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참과 거짓처럼 본질이 구분되는 개념인 거다. 현실이 참이고, 꿈은 거짓이다. 그러니까 현실도 꿈이라는 나의 말은 그에게 “현실은 거짓이다”라고 들리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의 이해는 오해가 아니다. 현실이 거짓이란 말이지? 하고 되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문장이 마음에 들진 않아 그렇긴 한데… 하고 말을 덧붙일 것이다. 애초에 현실과 꿈은 참과 거짓의 관계가 아니라고. 현실이 반드시 참이 아니듯, 꿈 역시 반드시 거짓이 아니라고. 참이라는 것이 온전치 못하게 된다면, 거짓 역시 온전치 못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라고. 애초에 내가 부정하는 것은 현실과 참이 아니라 현실과 꿈, 참과 거짓 모두라고.

  하지만 교리주의자에게 나의 말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신이 유일한 신이라 말하라 협박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면 이곳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나를 그의 현실에서, 그들의 영역에서 내쫓아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질문은 전제부터 어긋나 있었으나 본질적이고 원초적이었다. 모든 것이 한낮의 꿈에 불과하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태어나든 그렇지 못하든 이번 생은 물론 ‘나’라는 사람 역시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허무주의적인 생각을 진심으로 가지고 있다면 기꺼이 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분명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질문이었지만, 그만큼 강력하고 위협적인 질문이었다. 그건 꼭 교리주의자의 목소리를 대신해 신이 묻는 것만 같았다. 신의 물음은 언제나 본질적이었고 적나라했으며 냉혹하리만치 단호했다. 어떤 논지든 신은 우리를 벼랑 끝에 세워둔 채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진실임을 증명하거나 진심으로 믿고 있음을 증명하도록 강요한다. 말하거나 뛰어내리라고, 신은 묻는다.

  벼랑 끝에서 나는 머릿속으로 그런 죽음과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떤 생도 꿈일 수밖에 없고, 그 깨달음은 그 생의 끝으로 이어진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깨달음을 얻고,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또 태어나지만 같은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한다. 새롭게 태어난 생은 뻔하게 죽는다. 깨닫고, 죽는다. 또 깨닫고, 또 죽는다. 머릿속으로 몇 번의 깨달음과 몇 번의 죽음을 반복하면서 나는 질문의 맹점을 깨달았다. 꿈을 오로지 악몽으로만 여긴다는 것. 현실이 꿈이 된다는 말은 현실은 죄다 악몽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악몽이 아니라면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도 나는 그 꿈을 계속 꿀 수 있었다. 나쁜 꿈이 될지 좋은 꿈이 될지는 내가 만드는 거니까(물론 무엇이 좋은 것인지 역시도). 어찌 보면 현실을 꿈으로 전복시켜 신의 자리를 탈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임의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지만, NPC에서 플레이어가 되는 것으로 나는 절대적이라 착각했던 무언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멋대로 팔을 한 번 휘젓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나는 멋대로 한다는 것에서 일전에 느껴본 적 없는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더욱 그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멋대로.

  “나는 좋은 꿈을 꾸고 싶어. 친구에게 난도질당하는 꿈같은 거 말고.”

  이런저런 이야기와 생각 끝에 나는 답했고, 친구는 얼마 안 가 술기운에 잠이 들었다. 그는 잠들었고, 신은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던 나는 작은 단칸방에 앉아있었다. 앞에는 식은 맥주캔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어쩌면 애당초 이곳에 가둔 놈의 뜻 역시 이따위 해방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악몽 같은 현실 대신 진짜 같은 길몽을 꿀 자격이 있는 놈인지 얼굴을 한번 보겠다는 심보로 신은 잠깐 다녀간 것이었다.

  후에 그는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저 형이 말은 잘해, 정도로 그때를 술회할 뿐이었다. 그 대화가 그에게는 하나의 꿈처럼 가뿐했다는 것에 나는 허공에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3.

  가끔 죽은 이를 상상하며 어쩌면 내가 전생엔 다른 누구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대단한 위인들을 보며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고,―전생에도 나는 대단히 영특하거나 성실한 사람을 못 되었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을 무명(無名)의 누군가를 나는 상상한다. 부러 고집을 부리는데 변덕도 심해 평판이 좋은 사람은 못되어 역사는 물론 가족마저 잊어버린 누군가를 나는 그린다.

  예를 들면 어떤 사내가 있다.

  사내는 너른 평야가 펼쳐진 전장에서 정신 못 차리고 쭈뼛댄다. 뒷걸음질 치다 시체를 밟고 넘어지고 나서야 사내는 정신을 차린다. 적군을 하나도 베지 못한 채 평야에 주저앉은 사내는 말발굽에 으깨지는 고을 이웃의 뒤통수를 봤다. 작디작은 마을에서 당차게 전쟁에 나온 것이 고작 사내와 이웃 둘 뿐이었는데, 이웃은 사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시체가 되어 말에게 짓밟혔다. 가족의 만류도 뿌리치고 나온 사내는 생각한다. 전투의 헛됨에 대해. 나라의 쇠망에 대해. 가족의 안위에 대해.

  사내는 전장을 뒤로 한 채 달리고 또 달린다. 살고 싶다, 살아남고 싶다는 말 대신 전쟁은 무용하다는 깨달음과 나라는 무너졌고 가족을 지키는 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책임이라 자각을 속으로 뇌며 사내는 망가진 발목으로 쉼 없이 달린다. 고요한 산비탈에서 사내는 심호흡을 한다. 제 목숨 하나도 간수(看守)하지 못하는 놈이 무슨 나라를 구해…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놈이 무슨 나라를 구해… 사내는 중얼거리며 호흡을 내뱉고 죽기 살기로 달린다. 마을에 도착한 날 새벽 사내는 고향의 정겨운 흙냄새를 맡고는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으로 환향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꾹 참은 채 노모와 어린 아내를 조용히 깨운다. 꿈인지 생신 지도 모르는 노모를 등에 업고 사내는 아내와 함께 마을을 등지고 도망친다. 이태 후 그는 유난히 해가 일찍 기우는 변두리 마을에서 나라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발목 인대가 끊어진 채 절뚝이는 사내는 평생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사내는 무너지는 나라의 병사였다. 사내가 모시던 사람이 유명한 장군일 수도 있고, 그의 나라를 무너뜨린 장군이 유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내는 그들처럼 역사의 한 문장의 주인공은 되지 못하고, 많은 것이 함축된 역사서의 문장들 사이에서 그럴 수밖에 없이 자족하며 사는 인물이었다. 그건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차원에서 나는 같은 방식의 삶을 영겁 반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전생은 기억하지 못한 채 비슷한 습성으로 살아갈 테니 말이다. 나라는 녀석은 계속해서 태어나고,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산다. 이미 억겁을 깨고 죽었을 수도 있고, 앞으로 억겁을 깨고 죽어야 할 수도 있다. 끝없는 생의 반복이라니. 상상만 해도 토악질이 나온다.     

  어쩌면 그런 게임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행복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게임. 생이라는 것이 결국 한낱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떤 고집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전까지는 목숨이 끊이지 않는 게임. 최종 단계에 이를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 사는 내내 무언가에 집착하고, 끝내 죽음을 마주한 순간, 비겁하게 아닌 척하지만 아쉬움을 버리지 못한다. 이를테면, 그때 이웃 녀석처럼 떳떳하게 싸우다 죽을 걸 하는 생각을 평생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그럼 다시. 또 태어나고 무언가 집착하는 생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다. 죽음을 마주한 순간엔 생에 어떤 아쉬움도 없을 때까지. 바라는 것 하나 없이 기꺼이 죽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한다.

  그리 보면 지난 게임(前生)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이런 생을 수없이 다시 살고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수없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아마 제정신으로 이 게임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억겁의 미련이라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억겁의 미련을.     

  이를테면 나는 전생에 두고 온 세 발 고양이를 상상해본다. 검은 얼룩을 가진 고양이였고, 성격이 사나워 마을 사람들은 모두 녀석을 미워했다. 늘 눅진 곳을 좋아하던 녀석은 발이 더러웠다. 사람은 좋아하지 않으나 따뜻한 곳을 좋아했던 녀석은 이 집 저 집을 서슴지 않고 들어가 슬쩍 아랫목을 차지하기 일쑤였다. 민첩한 녀석은 집주인이 문을 발칵 열면 재빠르게 문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한 번은 소문난 지주의 맏아들은 노비를 시켜 문을 여는 순간 녀석을 단박에 낚아챈 적이 있다. 맏아들이란 놈은 잡것이 다신 마을 사람들의 집안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고양이의 발을 잘라버리라 명령했다.

  그날 밤, 녀석은 용케도 한 발을 잃은 채로 내 집 아랫목에 겨 들어와 있었다. 기운이 없는 녀석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힘겹게 노려볼 뿐 도망치지 못했다. 나는 내 몸 하나 가누기도 버거운 노인네였기에 녀석을 그대로 둔 채로 이부자리를 폈다. 밤새 피비린내가 났다. 녀석은 다음날에도 용케 숨을 버티고 있었다. 나는 녀석 앞에 물 한 사발을 들이밀었다. 녀석은 필사적으로 물을 마셨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는 아이였다. 나는 그 생의 마지막을 그 아이와 보냈다.

  죽어가던 순간 녀석은 맥이 멎어가는 내 목덜미를 연신 핥았다. 녀석은 살아나라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와 달리 너무 많이 늙어버린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다리가 세 개인 그 아이를 그곳에 두고 온다.

  미약한 나의 정신을 필사적으로 깨우던 아이의 거친 혓바닥이 여전히 내 목에서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 아이를 두고 전생을 떠나왔다. 그 녀석 말고도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두고 와야 한다. 수많은 형제와 부모를 두고 와야 하고, 평생 모아둔 돈과 땅을 두고 와야 한다. 수없이 참아낸 욕망은 물론이고, 수없이 저지른 실수마저 두고 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이미 건너버린 바다 저편을 그리는 것과 같다. 매일 바다 저편을 바라보며 무엇을 얼마나 쥐고 있든지 간에 언젠가 이곳도 저곳과 같이 그럴 수 없이 모두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뇌는 것이다. 가족도 욕망도. 나는 모두 고양이와 함께 전생에 두고 와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면, 되레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아무래도 잔인한 저주다. 평생 전생을 그리다 이생을 망가뜨리고, 이유 없이 끌어당기는 후생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감에 생을 저주했으리라. 그리 전생을 그릴 때면 나의 업은 이생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웁다는 걸 조물주 역시 아는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인다.



  4.

  또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태어난 것은 영문도 모른 채 외딴섬에 떨어진 것과 같다. 기본적으로 생의 본질은 섬의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고향이 어딘지도 모른 채 낯선 섬에 도착한 이방인. 태어났다는 것은 그와 같다. 나도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내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낯선 섬에 발을 디딘 나는 괴롭게 운다. 섬에 발을 딛는 순간 새로운 몸을 받으며 나는 뜻 모를 고통을 느낀다. 지난 생이 부끄러워선지, 끝없이 반복되는 생이 끔찍해서인지 알 수 없다. 아기가 된 나는 그저 한참을 우짖다. 우짖고, 우짖는다. 지난 생이 그토록 그리워선지, 지난 생을 모두 토해내는 건지 알 수 없는 울음을 한참 내뱉고 나면 나는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한다. 왜 울고 있었는지도 잊고, 이내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됐는지도 잊는다.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그 섬의 삶뿐이다. 단지 이 섬에 두 발 붙이고 존재한다는 상태. 있음. 그것뿐이다. 일종의 무지한 실존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그것 외에는 아무런 인지도 없이 나는 이 섬이 내 세상 전부인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지나온 섬에서 그랬듯이. 매번 섬과 섬을 건너가지만, 매번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섬에 발을 딛고, 섬을 떠난다. 지난 영겁의 시간 동안 몇천 번이고 반복했을 이 짓을 나는 끝 간 데 없이 반복한다. 나는 그런 상상을 한다.     

  섬의 삶에 몰입하면 으레 잊어버리는 것들이 있는데, 손에 쥔 과일과 접질린 발목은 사실 같은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손에 든 것은 내가 가진 기쁨이고, 접질린 발목은 내가 가진 상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그 섬에 두고 온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망각하지만, 동시에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섬에서 있었던 일은 섬에서 끝난다. 기쁨과 성취가 그러하듯, 슬픔과 고통도 그러하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두고 바다를 건넌다. 그리고 이 섬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이 섬의 삶은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것처럼 우린 그곳에 다신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을 망각한 사람들은 그곳을 제 고향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또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고향마저 잃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천적으로 이방인이고 본질적으로 이방인이다. 우리 생은 고향이 될 수 없고, 우리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리석게 감정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망토를 둘러맨 놀이터 골목대장처럼 으스대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고, 벼랑 끝에 아득한 어둠을 내려다보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태초에, 그리고 끝내, 이방인이라는 깨달음만 기억한다면 말이다.



  5.          

  나는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조금은 스스로 서러운 인생이라 생각하면서 누군가에게 매정한 짓을 서슴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삶. 그런 와중에 어째선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 하나를 가지게 되고, 어영부영 하루를 보내며 한 주를 채워나가고 그렇게 소화해낸 한 해 한 해를 겹겹이 쌓아가는 평범한 삶. 나는 이방인의 마음으로 이런 생을, 이런 꿈을 꾸고 있다.

  생은 한 편의 장편 소설과 같다. 잠들어 꾸는 단막극 따위인 꿈보다야 이야기가 긴 점에서 그건 장편이고, 책장을 덮으면 모든 이야기는 허상이라는 것에서 그것은 소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이 단지 소설에 불과하다고 해서 책장을 확 덮어버리는 니힐리스트가 아니다. 생은 고작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러니까 생은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말은 소설은 모두 쓸모없는 거짓이고, 꿈은 모조리 악몽이라는 말이 아니다. 더러 그런 논리적 곡해가 일어나곤 하지만 나는 그저 나의 소설이 좋은 이야기이길 바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니힐리스트가 아니라 낭만주의자다.

  생은 그저 장편 소설이다. 그리고 나는 이방인으로서 가뿐하게 이곳을 거닐 것이다. 그 후 언젠가 다른 곳을 거닐러 갈 때가 되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떠나리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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