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은 묘하게 ‘불확실성’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된다. 일부러 그런 주제들을 찾아 읽으려 한 게 아닌데도. 심지어 내가 무슨 가상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과학책을 읽고 있는데도.
시작은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였다. 지은이는 양자 역학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는 과학자.
불확실성(불확정성, 미결정성) 원리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치만 나는 양자가 뭔지도 모르는, 그의 이름도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자연과학의 문외한이다. 이 책은 제목이 멋있어서 골랐는데, 어려워서 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몇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다. (그런 책이 있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지는 못했어도 너무 좋구나! 라는 것만은 알 수 있는 책, 내겐 이 책이 꼭 그랬다. ) 그래서 원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가,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도 많아서 귀퉁이를 살짝 접은 채 (그러다 접은 부분이 너무 많아져서) 서점에 가서 최신 번역본을 새로 샀다. 그리고 마음에 담고 싶은 문장에 모두 밑줄을 그었다. 그것만도 두 시간이 걸렸다. 신판과 구판의 번역 중 뭐가 더 멋있나.. 이런 생각까지 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오타도 어색한 문장도 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옛날 번역본의 글이 와닿는 순간이 많아 조금 아쉽기도 했다. 참.. 한끗 차이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단 말이야. 언어란 참 신기해.
재미있게도 내가 이 책을 대여한 오후, 나의 동네 친구이자 퇴근 메이트 하샘이 똑같은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왔다는 것이다. (설마 이런 책은 아무도 안 빌려 갔을 거야, 라는 확신을 가지고 ㅋㅋㅋㅋㅋ 그런데 대출중이라 도대체 누가 빌려간 거야? 했는데, 그 누가 바로 나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빨리 반납하라는 독촉 아닌 독촉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가 진짜로 양자 물리학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늘어놓았다면 나는 중도에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양자의 개념도 모르는 내가 양자 도약이며, 슈뢰딩거, 막스 플랑크, 아인슈타인 등과 나눈 대화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물리학과 사랑에 빠진 학자의 에세이로, 과학자의 윤리, 종교, 정치와 과학의 관계, 진정한 ‘이해’의 의미,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 나치 지배 하에서 자신의 신념과 과학의 미래, 전쟁 후의 세계를 염려하는 한 인간의 고뇌로 읽었다. 그렇게 보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멀리 있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가 다른 과학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참 좋았다. 특히 스승이자 친구이기도 한 닐스 보어와 나누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어떤 것을 탐구, 공부할 때 지녀야 하는 태도로서도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이걸 읽으면서 <사회 문화> 교과서의 첫 단원, 첫 페이지의 사회문화 현상과 자연 현상을 대조해놓은 부분을 좀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이 대조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냥 가르치고 있었지… ㅜㅜ) 자연의 세계도 그렇게 객관적이고, 그렇게 예외 없이 규칙적인 것만은 아닐진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무 자르듯 나눠놓을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애들이 자연 과학은 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생각해버리면 어떤 일이 생길까. (확실성이 지배한다 해도 우리가 찾은 법칙이나 개념이 확실하고 본질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을텐데)
가장 좋았던 것은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은 이 대학자가 참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물리학자들이 먼저 원자 폭탄을 만들어 2차 세계대전을 끝냈을 때, 어차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날 전쟁인데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켜가며 원자 폭탄을 개발하고 무기로 사용하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분분했던 모양이다. 그때 글쓴이는 독일에 있던 물리학자들이 그 점에서는 단지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 이라 말한다. 나는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 내가 미국의 물리학자들이었다면 절대 안그랬을 거라거나, 하는 식이 아니라서. 그 상황에 놓여보지 않은 우리는 그 순간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지 않은가. 남을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그런 갈등의 순간에 놓이지 않아서, 좋은 목적을 위해 나쁜 수단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어서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하지 않는 그런 겸손한 마음가짐이 좋다.
내가 왜 이 사람과 이 책에 빠졌나 생각해보니 한 가지 이유는 그가 ‘불확실성’을 주장한 학자답게(?) 단박에 결정하거나 확고하게 단정하는 대신 ‘망설이는’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사람들이 우유부단하다, 할 수 있는 그 망설임이 그를 더 좋은 학자, 더 좋은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히틀러에게 복종하는 시늉을 해야 하는 것, 무기 개발을 요구받을 것을 걱정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고 또 망설이는 순간이 떠오른다. 그가 결론적으로 독일을 떠났냐 남았냐 하는 것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에서 조국을 등진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수 있으며, 남기로 한 이상 나치가 시키는 일을 흉내라도 내야만 살아남는 비극을 또 어떻게 욕할 수 있을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의 순간에 하이젠베르크가 망설이고 고뇌하고 또 망설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많은 생각들, 그게 내겐 이상하리만큼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나도 그렇다. 나는 이른바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 때론 그의 결단력이 부럽고, 또 자신의 생각과 결정을 확고하게 믿는 자신만만함이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태도가 부담스럽게, 또 압박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살다보면 그런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고, 그런 순간에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간 모든 걸 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그런 결정을 했냐 아니냐보다 그 과정에서의 망설임과 고뇌, 적어도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그런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난 내 생각이 분명하게 “옳다”고 강하게 믿고, 그걸 강력하게 드러내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동생은 내가 확실한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이라서 일타 강사는 못 될 거라고 놀렸다.
응, 맞다.
100퍼센트 정확한 정답을 몰라서 못알려주기도 하지만, 나는 애시당초 그런 확실한 정답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것, 나는 그런 게 좋다. 그래서 문학을 좋아하건만, 사회과학에서도 그런 상상력은 무척 중요하다. 맥락에 따라, 관점에 따라, 사회 변화에 따라 우리가 배우고 외웠던 것들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그리고 달라져야 하니까.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의 세계도 불확정적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불확실함이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학문의 세계에선 그런 게 좋고(인간 관계는 애매한 걸 싫어하는 모순적인 나 ㅋㅋㅋㅋㅋ) 예측불허의 다른 게 존재할 가능성이 있어서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뭔가 고정불변의 어떤 게 정해져 있다고만 하면.. 그것을 찾는 것만이 미션이라면 어쩐지 답답하다.
며칠전 만난 친구가 자기 아들이
상황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고민하는 게 너무 싫어서, 때론 고민하다 자기 할 말을 못할 때도 있고 바보가 된 거 같은 느낌이 들 때도 많아서, 기준을 정하기 힘들단 이유로 그냥 하나의 원칙을 정해두고 무조건 그걸 따르기로 했다는 얘길 했다. 친구는 아들의 그런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순간엔 쫌 더 다른 사람을 배려했으면 좋겠는데, 아들이 정한 원칙은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고 결과적으로 너무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망설이는 순간이 의미 있는 거니까 아들에게 망설이고 고민하는 것을 그렇게 나쁘게만 보지 말아달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종종 단순하게 살고픈 유혹에 이끌리지만, 우리의 사유는 이것 저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순간에 넓어지는 거 같다고. 친구는 나의 ‘망설이는 인간’에 더해 ‘후회하는 인간’이 지닌 미덕을 알려주었다. 한치 후회도 없는 것보다,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는 후회하는 인간이 낫다는 걸.
그런데 다 쓰고 보니
또 일상에서 나는 생각나고 하고 싶은 걸
그다지 깊이 고민하지 않고 저질러버리는(?) 그런 사람이라(그래서 후회는 많이 하지 ㅜㅜ 망설임이 부족해서 후회가 많은 걸까나..) 내게 부족한 그런 면모를 가진 이 학자에게 끌린 것인지도ㅡ
덧) 제목의 그림은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 이라는 만화에서 캡쳐한 건데, 어쩐지 만화 속 이 사람이 내가 그리는 그런 모습과 가깝지 않을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