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대신 욕망>(김원영)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는 다양하다. 성별, 장애, 국적, 직업, 가치관, 종교, 사회경제적 지위 등등…. 우리는 그러한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다양한 세계에 발을 걸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이 그렇게 여러 세계에 걸쳐져 있음에도,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여기는 것, 특히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떠올리는 핵심적인 정체성은 제한적일 수 있다. 자신을 누구라고, 어떤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것 자체는 특별한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자연스럽다. 삶의 목표나 가치를 모색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언제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정체성의 규정이 넘을 수 없는 어떤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을 밀어내기도 한다. 마치 어린 시절 책상에 줄을 그으며 짝에게 “이 선을 넘어오지 마.”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툰 뒤에 일어나는 어린 학생의 심술 정도라면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다. 그 선은 며칠 뒤면 흐지부지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 우리 사회에서 그 선은 누군가 의식적으로 지우려 애쓰지 않는 이상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더욱 또렷해진다. 그 선이 또렷하면 할수록, 지울 수 없는 불변의 것이라 생각하면 할수록 선 밖의 누군가를 밀어내는 힘은 강력하다. 게다가 선 너머의 사람들은 “너도 넘어오지 마!”라고 똑같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경우가 많다. 선을 긋는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회의 다수(majority)에 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선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내는 힘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힘은 다른 한쪽을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다. 그 선 안의 사람들과 바깥의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그 선은 성 정체성이 되기도 하고 직업이나 경제적 지위, 때로는 사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넘기 어려운 선 중 하나가 바로 장애의 유무로 갈라지는 선이 아닐까.
책 <희망 대신 욕망>의 저자는 서울대 사회학과와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이면서 연극배우인 동시에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나뉘어 있는, 극과 극의 세계에 발을 걸친 채 살아가고 있다. 이 두 세계는 그에게 혼란스러움을 안겨주는 동시에 두 세계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연결을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준다. - 이것을 기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니라 그 두 세계를 연결해보고자, 그래서 스스로 혼란과 부자유에서 벗어나고자 고군분투하는 삶이라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쪽에는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친구들, 또 다른 쪽에는 평생 작은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존재하는 삶 속에서 저자는 ‘인간 승리’라거나 ‘장애를 극복한 삶’이라는 식의 희망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부자가 되고, 인정받고 싶은’ 보편적이고 뜨거운 인간 본연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착하게, 욕심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수용하며 ‘이 정도도 어디야?’라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은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할 수도 있다. - 체념이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조건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경지에 이른다면,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애를 지녔다고 해서 모두가 욕심 없이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접근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저자는 장애가 있다고 해서 왜 꼭 착해야 하며, 비장애인들은 자연스럽게 갖는 더 커다란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되느냐고 외친다. 내가 이 책 속에서 찾은 한 문장은 다음 말이었다.
본래 쿨하다는 것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도피처다.
이 문장은 무척 씁쓸하고,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왜 아무런 욕망도 없는 것처럼 초연하고 쿨하게 굴어야 해? 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 마냥 슈퍼 장애인이 되어야만 해? 스티븐 호킹이나 헬렌 켈러가 아니면 어떠냐, 그냥 뜨거운 보통의 인간이면 안 되느냔 말이다.
그러나 그의 글이 내 마음을 울린 진짜 이유는 “우리 장애인도 욕망이 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당당한 외침이나 일반 고등학교,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이겨낸 숱한 역경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공감하고 연대해준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두 세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여전히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솔직한 고백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작은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욕망을 드러내라고 외치면서도 한편으로 정말로 스스로가 자신의 신체를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는지, 가려진 두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보여줄 수 있는지 여전히 두렵고 주저하는 마음. 글쓴이는 어쩌면 “너도 별 수 없잖아.”라는 냉소 섞인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고백을 솔직하게 담았다. 그러면서도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두 세계를 연결하려는 시도, 말 그대로 선을 넘는 ‘시도’를 한다. 우리 사회가 견고하게 그어놓은 선을 지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나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희미해지게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마치 씨줄과 날줄이 얽히듯이 자유롭게 교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용기는 잘 될 것이라 믿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안 될 줄 알면서도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드러난다. 나는 그의 용기 있는 시도를 응원한다. 그리고 별다른 희망도 욕망도 없이 특수학교에 다니던 그에게 “영문법 책을 한 권 떼고 밤에 나가 별을 볼 때의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가르쳐주며 더 큰 꿈을 꿀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던 그의 선생님,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건축가 유현준씨의 인터뷰를 보는데, 벤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벤치가 왜 그렇게 중요하지? 그건 다양한 사람들이 한 데 모이고 섞여서 지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너는 나랑 다르잖아,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만 들어와.”라면서 높은 담장으로 선 긋지 않는 것. 서로 다른 배경과 조건, 생각을 가졌지만 같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윤리적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를 나와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유현준 교수가 말했던 벤치와 광장은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공간으로서, 나뉘어진 세계를 연결해주는 이른바 ‘만남의 광장’ 같은 게 아닐까.
그러나 거창한 윤리 같은 것을 다 떠나 생각해보자. 모두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세계는 어떤가, 나랑 모든 것이 비슷한 애랑만 친구가 되는 것은 어떤가, 다른 애들이 이 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나의 세계는 얼마나 더 좁아져야 할 것인가. 넘어오나 안 넘어오나, 나는 얼마나 경계하고 애를 써야 할 것인가.
그러니 누군가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선 긋기의 세계야말로 얼마나 빈곤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