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죽음을 눈앞에 둔 철학자, 앙드레 고르의 편지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것, 그건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축복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라고 말하며, 사랑할 수 있는 대상, 즉 운명의 바로 그 사람을 만나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고 호소하면서, 마치 사랑이 자연스럽게 빠져들거나 샘솟는 감정인 것처럼 말하죠.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능력과 관계되며, 끊임없이 배워야 할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전 인격을 발달시키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경하며 상대방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인 노력과 책임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죠. 20대 초반 제목 그대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테크닉이 담긴 책인 줄로 오해하고 처음 이 책을 읽었던 순간, 프롬이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기술'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찾아보니 원제는 'The Art of Loving'이었어요. '사랑함'은 평생을 갈고 닦는 기예이자 예술활동과도 같은 것인가 봅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더불어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사람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기에 그 모든 것이 경이롭고 아름답게 다가올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들 그런 경험이 있으시죠? 밤하늘의 달만 봐도 같은 달을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평소와 그 달이 달라보이는 거.(저만 그런가요???)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경험
저는 그 모든 것 중에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특히 와 닿았어요.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나로 인해 그 사람이 웃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함께 웃고 행복해지는 순간, 나라는 사람이 꽤 멋지고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예전에 친구들이 "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라며 물을 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 음... 그 사람을 안다는 거지. 알아 볼 수 있다는 거야. "
제게는 "내가 너를 안다."라는 말이 "난 너를 사랑해"랑 동의어로 들리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그 의미대로라면 누군가를 알고 사랑하게 된다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여동생과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종종 나누었는데요. 사랑을 하게 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특히 내 감정의 밑바닥까지 다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가끔은 그렇게 들여다 본 밑바닥이 그리 멋지지 않아 괴로워하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내려가보는 게 전 더 좋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처음 사랑이라고 느꼈던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어려운 과제네요.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프랑스의 철학자 앙드레 고르와 그의 부인 도린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줌으로써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 결과 나뿐 아니라 상대방도 진정한 자신에게 이르게 하는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두 사람. 처음 앙드레 고르의 글을 읽었을 때 두근거려서 잠 못 이루던 밤이 떠오르네요.
제가 앙드레 고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년 가을, 그가 불치병을 앓던 부인과 동반 자살을 선택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였습니다. 그 무렵 죽기 전 그가 부인에게 바치는 편지가 <D에게 보낸 편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죠.
오스트리아 출신의 가난한 유대인 청년이었던 고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947년 스위스 로잔의 카드게임장에서 도린을 만났습니다. 처음 만나던 날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여자라 생각했지만, 두 번째 만나던 날 춤을 추러 가자는 고르의 제안에 도린이 흔쾌히 응하면서 둘의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고르가 묘사한 그녀의 모습은 사진 한 장 없이도 너무나 생생해서, 저조차 한번도 본 적 없는 도린에게 반할 것 같았죠. 두 사람은 가난했지만 스스로 본질적이라 생각했던 것을 지키면서 살고자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인의 죽음을 앞두고 고르가 쓴 편지는 지극한 사랑을 담은 연서인 동시에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담은 자기 고백의 글이기도 합니다. 그는 1958년 펴낸 <배반자>라는 책에서 아내인 도린을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로 그렸던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그 스스로 인정했듯 사랑의 기쁨은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내어주게 만드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도린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함께 죽음을 택함으로써 고르의 사랑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 사랑의 본질은 ‘함께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크기에 있다기보다, 그 사랑을 통해 서로가 안고 있던 불안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을 내어줌으로써 나를 내게 준 사람에게
도린에게 자신의 책을 건네면서 맨 앞장에 고르가 쓴 헌사는 " ‘당신’을 내어줌으로써, ‘나’를 내게 준 사람에게 "라는 말이었죠. 동시에 그는 <배반자>라는 책을 쓸 바로 그 당시에 이런 생각을 발전시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는 늙고 병이 든 아내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저는 아내의 죽음을 눈앞에 둔 남자가 아니라, 고독하고 가난한 지식인을 평생토록 사랑한 한 여인을 상상하며 그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독려하고, 그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감내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새삼 그녀는 참 멋진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고르는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니까요. 이 편지는 그래서 ‘어느 사랑의 역사’라는 부제가 참 잘 어울리는 글입니다. 첫 만남부터 죽음까지를 담기도 했지만, 불안한 두 영혼이 만나 오랜 사랑을 거쳐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이 뭔가 자기 희생을 의미하는 것 같나요?
뭔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서 사랑이 '의무'가 되어버린 느낌이 드는데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희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희생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니까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쁜 마음, 경험해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그럼 우리는 무엇을 주게 되는 걸까요? 무엇을, 어떻게 주어야 서로의 생명력이 더해질까요?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준다는 것'의 의미를 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 준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여기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 즉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꼭 그가 생명을 남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을 준다. 이것들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의 표현이며 드러냄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생명을 줌으로써 상대편을 넉넉하게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생동감을 강화함으로써 상대편의 삶의 감각을 강화한다. 그는 받기 위해서 먼저 주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기쁨인 것이다. ”
-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 김상일 옮김, 하서, 1999) 39-40쪽
* 이 글은 앙드레 고르의 책 <D에게 보낸 편지(2007, 임희근 옮김, 학고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1999, 김상일 옮김, 하서)>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