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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대 Nov 16. 2023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양윤옥 옮김 

여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남자들의 이야기는 숱하게 읽어봤지만, 오로지 남자의 시선과 감정을 담은 여자 이야기 묶음집은 처음인 듯싶다. 그것도 한 여자가 아닌 저마다 경험한 여러 명의 여자에 대한 진지하고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감정과 기억에 대한 속내는.


이들은 모두 혼자다. 
여자를 잃고 난 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화려한, 좋았던, 혹은 나빴던 순간과 존재하던 순간을 겪고 난 후의 감정은 당시보다 더 솔직하고 때론 차갑고 뜨겁다.  

정말 오래, 깊이 남는 기억은 그 당시의 감정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여운으로 자리한다. 

여자를 잃은 남자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흥미롭고 진지했다. 
뜨거운 커피를 한잔씩 두고 차근차근, 눈은 허공을 향하며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말투로 내게 직접 이야기하는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들이 뱉는 퍼즐에 어떤 위로도 할 수 없는 자리였겠지. 그저 듣는 것이 최선인. 잃을 것을 예감한 이에게 닥친 실제의 상황은 상상보다 더 큰 공허함과 슬픔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셰에라자드’와 ‘기노’가 좋았다. 


[본문 ‘셰에라자드’ 중]  
“어쨌든 학교 졸업하고 나니까 어느샌가 그를 잊어버렸더라.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깨끗이. 열일곱 살의 내가 그의 어떤 점에 그토록 깊이 빠졌었는지. 그것조차 잘 생각나지 않아.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그게 나의 ‘빈집털이 시대’ 이야기야.”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그에게 그것을 넉넉히, 그야말로 무한정 내주었다. 그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잃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그를 슬프게 했다.  


[본문 ‘기노’ 중] 
이상하게도 헤어진 아내나 그녀와 동침한 옛 동료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일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제대로 뭔가를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지만, 이윽고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날을 맞닥뜨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아무런 성취도, 아무런 생산도 없는 인생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당연히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제 기노는 이렇다 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고통이나 분노, 실망, 체념, 그런 감각도 뭔가 또렷하게 와닿지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렇듯 깊이와 무게를 상실해 버린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맥없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둘 장소를 마련하는 것 정도였다.

‘그게 언제일지’ 기노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다. 그것은 여자가 정한다.
그 생각을 하면 목구멍 깊은 곳에서 갈증이 일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가시지 않을 갈증이었다.


“상처받았지, 조금은?” 아내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 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본문 ‘여자 없는 남자들’ 중]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함께 나는 열네 살의 나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만 같다. 
야구팀 등번호의 영구결번처럼 내 인생에서 열네 살이라는 부분이 송두리째 뽑혀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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