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사물에게 말 걸기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는 상설전을 좋아한다. 시의성 있는 기획전도 반갑지만, 상설전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관람자에게 한결 느슨한 시간을 허락한다. 보고 또 봐도 좋은 영화나 책처럼.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는 기획전 위주로 운영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년간 이어지는 드문 상설전이다. 지난해 5월 개막 이후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그리고 올해 초 점심시간을 쪼개 다시 찾았다. 특별히 다시 보고 싶었던 작품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내 기준에서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강익중의 《삼라만상》이다.
가변 설치가 가능한 작품이다. 오래전 다른 소장품 전시에서는 패널을 가로로 이어 안쪽을 둥글게 두른, 하나의 방 같은 형태로 만났고, 이번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세로로 치솟은 광폭의 설치로 다시 마주했다. 가로·세로 50cm 패널 400장을 연이어 붙이고, 그 앞에 동에 크롬 도금한 반가사유상을배치한 작업이다. 이 작품이 수장고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관되어 있을지 궁금해졌다. 400개의 패널 안에 1만여 점의 3인치 작은 캔버스, 즉 사물들이 빼곡히 붙어 있기때문이다. 《삼라만상》이라는 제목처럼, 숱한 사물들을 뒤로한 채 반가를 튼 은빛의 부처는 깨달음의 미소를 띠고 있다.
깨알 같은 캔버스에는 인간의 삶에서 건져 올린 잡동사니, 공산품들이 매달려 있다. 탁구채, 딱지, 비빔밥 모형처럼 작고 사소한것들. 강익중은 개인의 일상을 기록한 작은 캔버스에서 출발해, 흩어진 이야기들을 하나의 구조로 엮어왔다. 자음과 모음이 모여 한글이 되듯, 그의 작업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기호와 문자,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소재를 연결하며 다중 정체성이 어떻게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13m의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압도적인 높이에 밀려 시선은 이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다 사물 하나와 눈이 마주치며 피식 웃음이 난다. 인간의 일상용품이란 어쩜 이렇게 못생겼을까. 그런데 그것들이 캔버스 위에 모이자 전혀 다른 서사가 시작된다. 범상하고 볼품없는 것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내는 숭고함이라니. 흔히 말하는 레디메이드 작업이지만, 나는 문득 늙어가는 사물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오래되고, 사소한 일용품은 무엇일까.
끝내 버리지 못하고 이고 지고 다니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기원을 가리키는 단서가 아닐까. 아쉽게도 내게는 세월과 함께 같이 늙어가는 사물이 수중에 거의 없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손에 남아 있는 오래된 것들이라 해봐야 해외여행에서 가져온 자석이나 스노볼, 엽서 같은 전리품들뿐이다. 잡동사니를 꺼리는 내 매정한 성향 탓에, 남아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강익중의 작업 앞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사물에 대한 경이라기보다, 오히려 사물을 지나쳐온 나 자신에 대한 뒤늦은 인식에 가까웠다. 나는 물건을 비교적 쉽게 정리해 왔고, 그 선택이 삶을 가볍게 만든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의 삼라만상 작업 속에서 한데 모인 사소한 사물들을 보고 나니, 버린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과 함께 흘러갔을 시간과 정체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손에 쥐지 못한 채 마음에만 남아 있는 기억들이다.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 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한다."
『분더카머』윤경희 지음, 문학과 지성사
나의 분더카머는 내가 소유하고 있지 못한 기억 저편의 어느 물건이다. 오래전 읽었던 윤경희 작가의 『분더카머』를 읽으며 난데없이 돌출한 이미지와 심상, 향기가 있었다.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내가 유년 시절 살던 아파트 바로 앞집에 살던 이웃 언니네 집이다. 나보다 한 살 많던 앞집 언니는 외동딸이었고, 그 집에는 우리 집과 달리 벽을 전부 책장으로 채워 넣은 방이 있었다. 어둡고 짙은 목제 가구에 둘러싸인 북향 방 한 칸, 지경사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폭풍의 언덕』, 『작은 아씨들』, 『80일간의 세계 일주』 같은 책들이 있던 곳.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서재를 알게 되었다. 뻔질나게 그 집을 놀러 가던 나는 우리 집과 달리 책이 주는 온기로 차분한 언니네 집 분위기를 좋아했다.
이웃집 언니 방 옷장 맨 아래 칸 서랍에는 언니만의 분더카머가 있었다. 내가 놀러 갈 때마다 수십 번 반복해서 보여 준 진귀한 물건이 있었는데, 손바닥만 한 크기의 꽃 모양 음각이 새겨진 하늘색, 아마도 세라믹 소재로 만든 보석함. 그것의 뚜껑은 더 정교한 꽃 모양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뚜껑을 열면 놀랍게도 보석이 아닌 빨간색의 말린 장미잎이 그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는 내게 향기를 맡아보라고 코에 가져다주곤 했다. 이 행위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그 하늘색 보석함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2025.05.01 – 2026.05.31
서울관 1층 1전시실 / 지하 1층 2전시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들을 통해, 사회 변화 속에서 미술이 형식과 태도를 어떻게 달리해왔는지를 따라간다. 추상에서 실험, 개념과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미술의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주해왔는지를 살펴보는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