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보이드 Daniel Boyd

노이즈처럼 남은 회화《피네간의 경야》전시를 보고

by 이따금예술

동시대 회화 작품을 보고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시장의 평가나 작품이 걸린 갤러리의 공신력과는 무관하게, 오롯이 자기 취향에 대한 확신으로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나는 때때로 일부러 작품의 배경은 뒤로 미뤄두고 먼저 오래 바라보는 쪽을 택한다.


최근에 감사하게도 “정말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동시대 회화를 만났다. 조각이나 영상 없이 벽에 걸린 2차원 평면 회화에 오래 목말라 있던 나는 국제 갤러리에서 다니엘 보이드의 회화를 보게 되었다. 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나 해설은 이후에 천천히 찾아보았다.


KakaoTalk_20260121_085828113_02.jpg 무제(LOTAWYCAS)
KakaoTalk_20260121_085828113.jpg Untitled (MDKTMOU)

불분명한 기억을 회화로 불러내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단정하게 완성된 화면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처음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를 회화로 치환한 명화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했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그의 회화는 전혀 다른 작업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닮은 듯 보였던 인상은 곧 사라졌다.


점심시간, 마침 관람자 아무도 없던 국제 갤러리 K3관. 정적만이 남은 공간에 잠시 머무르며 나는 다니엘 보이드의 회화에서 의도적으로 노이즈를 섞은 로파이 음악을 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혹은 한 세기가 지난 뒤의 현대인이 오래된 브라운관 TV로 흑백 무성영화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분명 갤러리 안은 고요했는데, 아주 잠깐 환청처럼 보이드의 화면 어딘가에서 ‘지지직’ 하는 소음이 스치는 듯했다. 구겨지고 닳아버린 종이, 불완전한 기억에서 끌어올린 기록들이 주는 우울함. 잊힌 역사에 가까운 슬픔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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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60121_085828113_05.jpg 익사하는 남자(drowning man)


이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이드는 호주 케언즈 지역의 원주민 혈통을 지닌 작가로,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지워지거나 누락된 시선과 기억을 지속적으로 소환해왔다. 갤러리가 제공한 핸드 아웃에 의하면 그의 작업 세계는 런던 자연사 박물관 레지던시에서 식민지 역사와 관련된 유물들을 연구하며 보다 뚜렷해졌고, 이후 식민주의와 지식 체계, 문화적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작가의 의도와 내가 본 바가 어긋나지 않았다는 쾌감도 있었다. 실제로 이번 회화 작업은 1950년대 호주 정부가 제작한 아동용 학습만화에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학습만화에서 비롯된 이 이미지들은, 역사가 어떻게 믿어지도록 만들어지는지를 묻는다. 식민주의적 신화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시각과 기억 속에 스며드는지를 드러낸다.


작품을 이해한 뒤에도 내 첫 감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니엘 보이드의 회화는 해설을 읽고 나서야 좋아지는 작품이 아니라, 의미를 알기 전에도 이미 말을 걸어오는 작품이었다. 지지직-소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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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60121_085828113_08.jpg 무제(PCSAIM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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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2025.12.09-2026.2.15일까지, 국제갤러리 K3 전시장, 한옥 공간에서.

전시 제목은 제임스 조이스의 1939년 소설 『피네간의 웨이크』 에서 따왔다고 한다.


작가소개_국제갤러리 제공

다니엘 보이드(b. 1982)는 호주 케언즈 출생으로, 현재는 시드니에서 거주 및 작업 중이다.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 《Daniel Boyd: RAINBOW SERPENT (VERSION)》(2023),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Daniel Boyd: Treasure Island》(2022), 국제갤러리 《보물섬(Treasure Island)》(2021), 시드니 캐리지웍스 《VIDEO WORKS》(2019) 등 개인전을 가졌으며, 제16회 샤르자 비엔날레(2025), 오카야마 아트 서밋(2022), 서울시립미술관 《UN/LEARNING AUSTRALIA》(2021), 브뤼셀 보고시안 파운데이션 《몬디알리테(Mondialité)》(2017),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모든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s)》(2015) 등 주요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더불어 2014년에 불가리 미술상을 수상하였으며 2022년에는 호주의 대표적인 인물화 공모전인 아치볼드 상(Archibald Prize)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 또한, 멜버른 건축사무소 에디션 오피스(Edition Office)와 공동으로 제작한 기념비적 조각 〈For Our Country〉(2019)는 ACT Architecture Awards 2020에서 4개 부문의 상을 수상하며 화제가 됐다. 그의 작품은 캔버라 호주 국립 미술관, 호바트 태즈메이니아 박물관 및 미술관,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등 호주의 주요 기관을 비롯해 런던 자연사 박물관과 파리 카디스트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