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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Feb 02. 2018

영화 <염력>

총체적 실패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근데 그냥 스포일러 당하시고 안 보시는 게 이득이에요.

그 좋은 "1987"을 보고도 아직 리뷰를 쓰지 않았는데, "염력"을 다 보고 나니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라 이걸 먼저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봐온 영화 중에 단연 워스트 영화 Top 5안에 드는 작품이다. 동시에 내 왓챠에서 둘 뿐인 평점 0.5짜리 영화인 작품이기도 하다(나머지 작품은 알포인트인데, 알포인트의 작품성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공포영화를 끔찍하게 싫어해서 그렇다).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면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는지 진지하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작품, 바로 "염력"이다.


염력에 대해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고르게 말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마땅히 칭찬해줄 만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데에 있다. 처음부터 평점이 워낙에 낮아서 사실 "도대체 얼마나 나쁜 걸까"하고 들어가서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지만, 아마 평점을 몰랐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끔찍한 영화였다.

그렇다. 이 영화는 나쁜 영화, 재미없는 영화, 망작 등의 평을 넘어 끔찍한 영화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나쁜 점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하자면 거의 논문 한 편을 써 내려가야 할 것 같으니 여기에선 간단하게 몇 가지 측면만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인물: 개성도 없고 개연성도 없고 아무것도 없음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어떠한 인물도 개성과 개연성을 갖추고 있지 못한 데에 있다. 여자 주인공은 루미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질리게 봤을 법한 "불행한 여주인공"이다. 아버지는 어릴 때 집을 나가고, 엄마와 힘들게 잘 살아보려고 했더니만 거대 세력의 이익 문제에 휘말려 불행한 삶을 맞이하게 된다. 뒤늦게 나타난 아버지란 작자는 한심한 소리를 늘어놓고 도통 보탬이 안된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개심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자신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에 도움을 받고 결국 그런 아버지에게 마음을 연다. 이 안에 '신루미'라는 캐릭터의 독특함은 이상한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캐릭터는 역동성도 없고 개성도 없어서 영화 몇 편을 보고 나면 우리 머릿속에 남을 여지가 조금도 없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본격적인 원인인 신석헌


사실상 주인공격인 신석헌은? 이 인물은 이 영화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핵심적인 인물인데, 가장 큰 문제는 이 인물에 아무런 개연성도 부여되지 않는다는 거다. 가족도 내팽개치고 근무하는 건물에서 커피와 휴지 따위를 훔쳐 쓰던 '막장인생'에 가까웠던 그가 초능력을 얻고 갑자기 개심해서는 딸과 철거민을 위해 싸운다. 그 감정의 변화가 정말 자신에게 초능력이 생겨서 생긴 우쭐함 때문인지, 딸이 처한 처지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디서 뜬금없이 갑자기 철거민에 대한 정의가 불타오른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계기가 되는 사건도 없고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도 없다. 영화의 기둥이 되어야 할 인물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전락하고, 이를 말미암아 영화가 전반적으로 무너진다.

한편 이 영화에서 신석헌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축 중 하나는 딸인 루미에 대한 죄책감이다. 영화 속의 묘사를 보면 집을 나갈 때 루미와 '눈을 마주치지만'(그것도 나중에 회상하는 장면을 보면 눈을 마주친 게 아니고 아예 딸내미가 문 앞에 나와서 대놓고 마주 본 것이었다) 그걸 외면하고 그냥 가버렸던 것이다. 다소 진부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 속의 석헌은 단 한 번도 딸에게 그 일에 대해 사과를 건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과장되게 말하자면 부성애라는 탈을 쓰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석헌이 자신의 노력도 아닌 뜬금없이 생긴 초능력을 바탕으로 면죄부를 받는 과정이다. 속죄가 아니다. 이 영화 속에 결국 석헌의 노력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감옥에 4년 다녀왔다는 것뿐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딸에게 미안하다 말 한마디 꺼내지 않는다. 태성건설과의 다툼 속에서 아내는 철저하게 잊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왜 그런 능력이 생겼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 "아빠 노릇 해보라고 아내가 줬나 보다"라고 뜬금없는 감성팔이를 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물은 실존인물 같지 않은 수준을 넘어서 서로 다른 인물로 얼굴과 이름만 놔두고 바꿔치기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게 '입체적'인 인물이라면 그 입체는 아마 클라인의 병 정도 되는 거 아닐까.

이 영화는 대체로 그렇다. 인물들은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인데 매우 진부하고 전형적으로 입체적이다. 사실, 입체적이지도 않다. 문학 시간에 배웠던 입체적인 인물은 이야기 속의 갈등 혹은 사건을 통해 인물의 성격이나 태도가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이야기 속의 갈등 혹은 사건을 통하지 않고 성격이 휙휙 변한다. 심지어 그 변화에 아무런 개연성도 없다. 앞서 말한 신석헌도 그렇고, 결말부도 그렇다. 진부한 부녀관계의 회복이라는 점은 차치하고,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나오는 데 곧 결혼할 사람은 찾아가면서 자신은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돌아온 아버지에게 살갑게 "아빠 뭐해 일해야지!"라고 말하면서 석헌을 다시 아버지로 인정한다. 억지로 갖다 붙이자면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도 아버지를 받아들일지 말지 확신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당연히 이 영화에선 그런 묘사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영화의 킬링포인트는 단연코 홍상무다. 이 인물은 구성상으로도 스토리상으로도 전혀 등장할 이유가 없다. 이 인물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태성건설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사이코패스 같은 모습을 연출해뒀는데 아무리 좋게 봐줘도 베테랑에 나오는 '유아인'의 아득한 열화 버전이다. 코미디니까 이런 과장됨을 이해해볼까, 하도 지쳐서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더니 감독이 갑자기 이 인물의 입을 빌려 "너도 나도 노예"라느니 진짜 성공하는 사람의 무기는 국가 그 자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사이코패스도 정상인도 아니고 일관성도 없는데 웃기지도 않다. 캐릭터는 강렬하지만 딱 그것뿐이다. 비중 있는 척 등장했지만 철저하게 공기 같은 인물이다. 용역깡패를 몰아붙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부딪힐 일이었고, 신석헌을 압박하지만 정작 신석헌이 뛰쳐나간 건 TV에서 본 강제진압 생중계 때문이었다.

심지어 저 사회고발 장면에서 이 사회에서 진짜 능력을 가진건 자신도 석헌 같은 초능력을 가진 인물도 아니라 이 사회에서 원래 이기도록 태어난 인물들, 국가 그 자체가 능력인 사람들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도대체 이 인물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후반부에 다소 허무맹랑하게도 기업 자체도 아니고 기업이 외주를 맡긴 용역업체에게 경찰 지휘관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설정한다. 한마디로 홍상무는 일반 경찰도 아니고 중무장한 경찰 수십에서 수백 명을 대낮에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계약한 용역업체 사장이 경찰 지휘관에게 소리 지르고 사실상 지시까지 가능한 지위를 준 셈이다. 그런데 결국 자신도 이 사회에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란 소리다. 그렇다고 그 뒤에 사실 흑막이 있었습니다, 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홍상무가 심도 있게 만든 캐릭터가 아니든지 대사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열한 게 아니거나, 둘 중 하나란 소리다. 아니면 둘 다 이거나.


좋은 의도인 척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주변인들


이 영화의 핵심 소재는 뭘까? 염력, 초능력, 부성애 같은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철거민 문제다. 용산참사에서 모티브를 따왔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철거민의 고통받는 삶을 그리고,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기업, 그들의 용역을 받은 소위 '용역깡패(혹은 용역업체)', 그들과 결탁한 국가의 횡포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주제의식의 차원에서 보자면 염력은 어디까지나 이를 풀어나갈 '초월적 힘'에 불과하다. 

인터넷을 간단히 찾아보면, 그래도 용산참사를 그려낸 점은 좋았다거나 좋은 소재 선정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런 주제의식을 잘 살려내고 있을까? 사실 평점만 봐도 그게 아니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영화의 대부분은 그 주제를 소화해내는 방식이 문제다. 너무 진부하게 이야기를 진행했거나, 너무 사실묘사에 치중해서 영화적 재미를 잃었거나, 영화적 재미에 치중해서 사실을 왜곡했거나.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는 좋은 의도인 척하고 있긴 하지만 영화 속의 인물은 물론 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 그 누구도 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해결하려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영화를 보고 난 그 누구도 이러한 외면에 대해 "이런 문제를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을 그린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철거민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영화 속에서 철거민이라는 소재는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 감독이 의도했든 안 했든 이야기의 중심에 와야 할 철거민의 삶이나 그들의 고통은 그저 진부한 조폭의 횡포상을 그리는 것 같은 장면 하나에 불과하다. 철거민이 장례식장에 우르르 들어와 난장판을 치고 간 다음 장면은 아버지인 신석헌이 방에서 초능력을 시험하고, 기겁하는 장면이다. 신석헌은 죽어버린 자신의 와이프에게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진심 어리지 않은 형식적인 관심조차도 딱 한 번 비치는 것이 장례식장에서 "병이 있었나"하는 장면밖에 없다. 이런 장면은 거듭 반복된다. 심각한 장면 뒤에 우스꽝스러운 신석헌의 모습이 이어진다. 

문제는 그 호흡이 굉장히 난잡하다는 데에 있다. 철거민의 고통에 관객이 공감하거나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우스꽝스러운 화면 하나하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해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웃음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어이없고 당황스럽다가, 중간부터는 불쾌해진다. 이 과정 속에서 영화가 철거민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가 철거민의 삶에 대한 공감이나 최소한 동정 혹은 관심에서 시작했다면 절대 이 소재를 이렇게 가볍게 다룰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삶을 유쾌하고 밝은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했다면, 고통받는 장면 뒤에 누가 봐도 웃음을 유발해보려고 하는 장치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집어넣어서는 안 되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점에서 철거민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모욕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 염력은 도대체 뭡니까?
: 스토리와 영화적 재미를 한 큐에 해결해버린 파괴적 소재

아무리 그래도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주인공인 석헌의 초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 염력은 모든 문제를 간단하고 속 시원하게 해결해줄, 말 그대로 '초능력'이다. 많은 대화와 갈등, 수많은 사건과 감정의 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을 이 영화에서는 그의 초능력을 통해 모두 해결하고 있다. 

심지어 그의 초능력은 정체모를 운석 비슷한 것에 의해서 지하수를 통해 흡수된 것인데 수많은 사람이 공유할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흘러가기 마련인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맞적수가 없다. 덕분에 석헌의 능력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능력으로 남는다. 영화가 지극히 단조롭고 개연성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핵심적인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재 자체인 셈이다. 관객은 어떤 갈등 상황 앞에서도 어차피 석헌이 자신의 초능력으로 시원하게 해결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의 긴장감도 조성되지 않고, 덕분에 석헌의 초능력은 오히려 밋밋해진다. 감독에게 석헌의 초능력은 복잡한 구성과 세밀하게 조율된 대사 없이도 문제 상황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치트키 같은 존재지만, 동시에 관객의 재미도 속 시원하게 '해소'해버린 셈이다.


불쾌하고 끔찍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하고 끔찍했다. 첫째로는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재를 이렇게 가볍게 다루는 감독의 방식이, 둘째로는 이런 영화를 우리에게 선보이는 영화의 태도가. 이 영화는 돈을 내고 객석에서 2시간을 앉아있을 사람들에 대한 의무감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적 즐거움도 작품성도 전혀 느낄 수 없다. 가끔 개연성은 없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어서 보게 되는 그런 영화들이 있는데, 이 영화는 당연히 그 근처도 갈 수 없는 영화다. 최소한 영화로서 상영관에 걸려고 만들었다면 이렇게 무책임한 태도로 만들어선 안됐다. 이 영화에 대해 '총체적 실패'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솔직히 말해 시간이 아깝고, 돈이 아깝고, 그걸 보자고 영화관까지 찾아간 내 체력이 아깝고, 그 영화를 보려고 뜨고 있었던 눈과 듣고 있었던 귀가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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