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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Jul 05. 2018

좋은 글과 한자말

좋은 글에는 한자가 꼭 들어가야 할까?

페이스북에 글을 쓰다보면 종종 댓글을 받는다. 또는, 페이스북에서 나는 구독하지 않은 글들을 친구의 좋아요로, 공유로 만나보곤 한다. '글이 죽어버린 시대'지만 동시에 '글'이 각광받는 시대다. 글쓰기 플랫폼을 자처한 브런치보다도 페이스북에서 더 많은 글을 만난다. 개중에는 잘쓴 글이 많아 팔로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나도 왕년에 글 깨나 써보았으니 쉽고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없던 난독도 생길 것 같은 글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 글 속 표현 하나 하나에 섞인 치기가 내게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라서 쉽게 비난하지 못한다.


그런 글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주옥같은 한자 표현들이다. 불필요한 한자어의 사용은, 대개는 글쓰기를 통해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많은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나 또한 그랬다. 특히 동년배의 대학생들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데, 대개는 많은 양의 논문이나 교과서를 소화하다가 그 말투가 입에 밴 경우들이다. 또 다른 경우는, 그런 글들에 익숙해져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 '좋은 글'이다, 내지는 '있어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과거에 운영했던 블로그에는 온갖 한자말이 가득했고, 특히나 당시에 꽂혀있던 한자말이 많았다. 법학을 처음 접했던 시기엔 '합치된다'거나 '~의 구성원리' 같은 표현을 많이 썼다. 당연히 가독성은 꽝이었다. 절대 좋은 글이라고 부를 수 없는 글들이었다.


나 역시 한자 표현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불필요한 한자어는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한자어가 종종 필요한 것은 한자어가 오랫동안 학문적인 영역에서 쓰이면서 굳힌 특유의 입지가 있고, 그 표현을 통해서 독자에게 한층 더 명확한 뜻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적절하게 사용된 한자말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의미의 혼란을 야기한다. 나도 이렇게 한자어가 가득한 와중에 의미는 붕 떠버린 몇몇 댓글을 받고 결국 대댓글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 불필요하게 독자의 '뇌운동'을 자극하는 글은, 글쎄, 지적 유희를 자극하는 좋은 거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은 글이라고 부르기에는 미묘하다.

(혹시나 해서 밝혀두지만, 내가 그네들보다 글을 잘 쓰기 때문에 한 마디 해야겠다, 하고 쓴 글이 아니다. 나도 똑같이 저지른 실수였다. 나는 이런 실수를 바로 잡는 데 교내에 설치된 글쓰기센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글을 쓰다보면 의외로 간단한 원칙들을 놓친다. 그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내가 요즘 노력하고 있는 것은 짧게 쓰기, 다듬어 쓰기, 요약하기다. 내 글은 항상 장황했는데 당연히 그 이유는 퇴고를 하지 않아왔기 때문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도 남겨놓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간단한 부분을 다듬는 것이, 의외로 좋은 글을 만든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러한 '좋은 글'은 어디까지나 '읽히기 좋은 글'이고, 특히나 화면을 통해 읽히기에 좋은 글이다. 나는 종이로 인쇄되는 글과 화면을 통해 만나는 글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본다. 그러나 종이라는 매체와 화면이라는 매체는 독자에게 꽤 큰 차이로 다가온다. 한 번에 집중해서 볼 수 있는 텍스트의 양과 복잡한 정도 면에서 차이가 난다. 좋은 글의 기준도 거기에 맞춰 착착 변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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