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적 근대의 발흥 이후, 인류의 역사는 ‘권리 확장’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농경 시대 이후 국가라는 조직 시스템이 발명되며, 공동체의 의사 결정권은 거의 예외 없이 극히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가장 민주적이라고 일컬어진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도 극소수의 자격을 부여받은 남성 엘리트만이 정치적 권한을 향유할 수 있었으며, 왕정의 시대에는 왕과 귀족이 혈통에 따라 권리를 독점하고 공동체와 개인을 다스렸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영국의 명예혁명이 있었던 직후 공표된 권리장전은 완전히 새로운 권력체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 당시의 권리장전도 인민을 위해서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계층이 국왕의 개입이나 지시에서 벗어나 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고자 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전제적인 권력 행사로 인해, 정당한 이유 없이 토론과 합의를 거쳐 행사된 의회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음을 명시했다는 점은 큰 의의가 있다.
이후 영국의 권리장전은 미국 헌법과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하 프랑스 인권선언)에 기초가 되는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했다. 미국 헌법과 프랑스 인권선언은 천부인권,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권리, 국민 주권의 원리 등 현재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한 국가의 근간이 되는 권리 개념을 명시해 두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실제 현실은 영국의 권리장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언의 장대하고도 존엄한 가치 지향과는 상치되었다. 여전히 대부분 사람이 피지배 계급으로서 억압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당시 주창된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권리나 정치적 참정권 등의 권리는 백인 남성 부르주아 계급만 향유할 수 있는 매우 차등적 권리였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하거나 여성, 유색 인종은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으나,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기존의 사회 통념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지배층의 관념에 따르면, 백인 남성 부르주아가 아니면 인간이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지만, 권리장전의 메시지는 당시 억압받던 노동자, 유색인종 및 여성에게 가닿았고, 그들이 받고 있던 취급이 결코 정당하지 않다는 의식을 일깨웠다. 이후 노동 운동, 흑인 해방 운동, 여성 해방 운동, 민족 해방 운동 등 각종 해방 운동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권리의 언어는 해방과 권리의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에게 강력한 담론적 무기가 되어 주었다. 권리의 언어에 담긴 당찬 포부와 생명력은 그들의 현실이 당연하지 않다는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같은 문제의식을 품은 사람들을 단단히 결속하는 끈처럼 작용했다. 다소 더디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잇달았지만, 권리는 점차 확장되어 왔다. 이제는 가장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집단으로 여겨진 퀴어(Queer)의 해방을 외치는 운동이 가장 첨예한 자리에 서 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인간을 넘어 동물의 권리와 해방까지 외친다. 장구한 권리 확장의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한편으로 만시지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놀라운 권리 확장의 흐름 속에, 사람들은 점점 권리의 언어에 종속되고 있다. 권리의 언어와 확장의 양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각자의 권리만을 최우선시하며 공동체적 가치와 도리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고 있다. 이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의 이익 공동체를 만들어 그들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보장하라는 메시지를 내면서, 의견의 일치를 도모하기는커녕 외부 집단에 대한 반목과 혐오 정서를 최대화하는 현대 사회의 양태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비단 현상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 체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2024년 9월 7일, 3만여 명에 달하는 시민이 서울 강남대로 거리를 가득 메웠다. 600여 개의 단체가 연합하여 지금껏 가장 큰 규모의 기후 생태 정의 집회를 개최한 것이다. 다수의 단체가 모인 만큼 각 조직이 삼는 의제도 다양했다. 노동, 여성, 빈곤, 장애, 환경, 동물권 등 주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의 연합 집회였다. 이들은 각자의 의제를 ‘기후 생태 위기’라는 맥락 안에서 풀어내어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구체적인 메시지는 상이했지만, 주된 맥락과 틀은 일치했다.
“기업과 정부는 기후 생태 위기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져라!”
권리의 확장을 도모하는 이들이 모여 내건 주된 메시지는 ‘책임과 의무’였다. 기업과 정부는 기후 생태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로서 그에 걸맞은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라는 요구였다. 당연한 지적이자 정당한 요구다. 한국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 7위, 온실가스 배출 11위를 기록하는, 이른바 ‘기후 악당’ 국가다.
2018년 글로벌 생태발자국네트워크(GFN)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가 한국인처럼 살면 지구가 3.5개가 필요하다. 즉 한국인은 지구의 생태 한계보다 3.5배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의미다. 6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빠른 GDP 성장세만큼이나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세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려고 한다. 온실가스 배출과 생태계 파괴를 주도하는 세력은 정부와 기업이다. 개개인에게 책임과 노력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현재의 환경 캠페인을 뒤엎고, 정부와 기업이 먼저 스스로 사죄하고 책임을 지라는 이야기다. 지당한 말씀이다.
다만 이를 권리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니 뭔가 이상하다. ‘책임과 의무’를 내세웠지만, 거리에서 외치는 메시지와 각 조직의 의제는 ‘권리의 확장’이다. 책임과 의무와 도리를 요구하면서 권리를 확장하자고 외친다. 앞뒤 장단이 맞지 않는 말과 개념이 뒤섞여 있으니 외치는 참여자도, 지켜보는 시민들도 혼란스럽다. 언어의 힘이 빠진다.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가슴속 깊이 가닿지 않는다.
강력한 언어적 호소력은 시대의 맥락에서 도출된다.
권리의 언어는 대중 사회로의 강렬한 열망, 왕정의 붕괴와 새로운 권력의 등장, 자본주의의 맹아 등 시대 맥락이 결합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양차 대전 이후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는 중국의 굴기가 매섭다. 여차하면 인류의 비극을 자초할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도사린다. 또한 생명 절멸의 위기를 가시화하는 전대미문의 기후-생태 위기도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인간이 낳은 자식인 인공지능과 활물이 인류와 생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미지수다.
이 모든 상황은 ‘책임과 의무’라는 화두를 강력히 제기한다. 즉 생명 공동의 안녕을 위해 마땅히 져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 인류와 생명이 처한 위기는 권리의 확장이 아닌 책임 있는 자세로 주어진 의무를 실행할 때라야 위기 극복의 길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위기를 감각한 이들은 이를 무의식중으로 깨닫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적절히 표현할 언어를 모르다 보니 자꾸 익숙한 권리의 언어로서 책임과 의무를 이야기하게 된다. 고로 책임과 의무를 표현할 언어를 계발하고 이를 공표해야 한다. 허나 책임과 의무, 그 자체는 어딘가 권위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책임과 의무는 피지배 인민을 향한 권력자의 언어이기도 했다. 아마 이러한 맥락에서 책임과 의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이다. 대안 언어의 부재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권리의 언어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권리의 언어는 어떻게 도출되었으며, 어떻게 힘을 획득했는지 그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권리의 언어는 세 개의 기반 위에서 쓰였다. 첫째, 로마법, 게르만법과 같은 고대 서구의 관계 양식이다. 둘째, 마그나카르타(대헌장, 1215)와 같은 중세 귀족 사회의 전통이다. 셋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기독교 보편주의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 작성된 덕에, 권리의 언어는 초기의 생경함에도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다가설 수 있었고, 250년에 가까운 시간을 관통하는 초월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 결국 단발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사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상적 토대에서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임과 의무, 즉 인간의 도리를 천명한 언어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반도에서 쓰인 선언 중 미래 문명에 합치하는 선언은 단연 1989년에 쓰인 <한살림선언>이다. 1987년 민주화를 이룩한 직후 권리의 언어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을 때, 인류 문명 위기의 징후를 예민하게 감지하여 지구적 문명을 모색한 담대한 구상이었다. 한살림선언도 세 개의 사상적 기반 위에 서 있다. 첫째, 당시 최신 과학인 양자역학, 진화 생물학, 인지 과학 등을 접목한 ‘신 과학 운동’이다. 둘째, 서구의 사회 운동으로 실제 정치 영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녹색 운동’이다. 셋째, 중국으로부터의 사상 독립을 이뤄내고 장차 세계를 풍미할 서구 사상·철학에도 필적하는 한민족의 위대한 사상적 성취 ‘동학’이다. 위 사상에 근거하여 한살림선언의 저자들은 당시 전 세계의 문명을 ‘죽임 문명’이라 통렬히 비판했고, 한울의 영성에 기초한 ‘살림 문명’으로 개벽하자고 절절히 호소하였다. 그 당시 핵전쟁의 공포, 자연 환경의 파괴, 자원 고갈 및 인구 폭발, 정신 분열적 사회 현상, 경제적 구조 모순, 중앙집권화된 기술 관료 체제 등 문명 위기의 징후로 열거한 다수의 요소가 이미 도래했거나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실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이어 21세기 이후에 우리가 직면한 과제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새로운 선언의 기초를 현재의 문제 상황과 과거의 사상적 기반 위에 튼튼히 세울 때만이 시대를 관통하는 울림과 떨림을 자아낼 수 있다. 권리장전을 대체할 21세기의 새로운 선언은 네 개의 토대 위에 작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최신 기술 담론이다. 생태학, 생물학, 뇌 과학, 블록체인, 메타버스, AI 등 기술의 최전선에서 혁신적인 발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살림선언이 그저 공상적 철학, 철학적 공상에 머무르지 않고 과학적 이론을 충실히 분석하여 실증적 근거를 세운 것처럼, 최신의 기술 혁신을 철저히 분석할 때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미래를 개창하는 책임 있는 선언이 될 것이다. 나라를 새롭게 세운다는 각오, 즉 건국(建國)에 준하는 각오로 철학에서 정치, 사상에서 거버넌스까지 아울러야 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자연과 기계의 불가분적 관계에 방점을 두고, WWW(Wood Wide Web)와 WWW(World Wide Web)의 연결을 상상해 보자.
둘째, 문화·예술가 집단이다. 한국의 문화는 더 이상 한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 세계가 공유하는 지구적 문화로 발돋움한 지 오래다. 케이팝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게임, 웹툰 등 그 영역도 다양하다. 현 시점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문화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문화·예술인은 그 어떤 집단보다도 생태적 감수성을 깊이 지니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연령을 주목해 보자. 10·20·30대가 기성세대를 끌고 간다. 새로운 문화적 양식을 창조하는 건 늘 젊은이들이었다. 공통의 세대 경험을 기반으로 해 글로벌한 연대를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다. 또한 예술을 통해 정치·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와 수많은 조직으로 확장될 여지도 크다. 이들과의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여 연합을 이루는 것은 필연이자 필수다.
셋째, 아시아주의다. 생명과 지구는 21세기 인류가 반드시 붙들고 가야 하는 표상이다. 허나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시아다. 서세동점에 종언을 고한다. 서방이 지고 동방이 뜬다.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로 돌아온다. 대서양 세계가 추락하고 태평양 세계, 인도양 세계가 상승한다. G7보다 BRICS의 결정이 세계사의 향방에 더욱 중요해진 시기에 돌입했다. 일시적 국면을 지나 오래된 역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역사의 반전(反轉)이다. 한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판을 짜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시아를 선점해야 한다. 19-20세기 한·중·일을 비롯하여 러시아, 인도 등에서 발흥한 아시아주의를 학습해야 할 까닭이다. 안중근이 떠오른다. 조선의 아시아주의자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조선·중국·일본 연합론을 개진했다. 과연 군대와 화폐가 관건이다. 공동 화폐, 공동 군대를 만들자 했다. 각국의 언어도 공히 교류하며 익히자 했다. 허나 집필 한 달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미완의 기획으로 끝났다.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제국주의, 패권주의와 결합하여 결국 파국으로 귀결하였다. 21세기, 아시아주의의 쇄신이 필요하다. 동학과 생명평화사상으로 성숙한 아시아주의가 긴요하다. 신(新)아시아주의를 개창하여 아시아 공통의 정체성을 빚어보자. 동아시아부터 서아시아까지, 태평양부터 대서양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시베리아까지, 아시아를 품는 자, 온 누리를 품을 것이다.
넷째, 동학 문명론과 동학 정치론이다. 삼경론(三敬論), 특히 물건에도 한울이 모셔져 있으니 이를 공경함으로 덕에 합일하라는 경물(敬物) 사상은 AI 시대에 크게 주목받을 만하다. 21세기 지구적 문명의 초석으로 알맞다. 또한 동학 문명론은 다종다양한 종교를 아우른다. 다문명·다종교·다민족적 포용성이 내재되어 있다. 유·불·선·기독교를 모두 품었다. 서학에 대한 대응의 성격도 강하지만, 서학을 배척하지 않았다. 포함삼교를 넘어 포함사교를 이뤘다. 앞으로 이슬람까지 품어야 할 것이다. 지구인의 정체성을 빚어낼 사상적 토대로서 동학이 가장 알맞다.
문명론만큼 정치론도 긴요하다. 시대를 대표하는 선언이라 함은 필히 경세(經世)를 논해야 한다. 해방 이후 동학의 전승에 있어 가장 크게 단절된 부분이 동학 정치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학은 늘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여 그 누구보다 기민하게 대응했다. 동학농민혁명, 3·1혁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더불어 동학에 기반한 정치 구조를 세우고자 한 역사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부터 해방 직후 창당한 청우당까지, 척사(斥邪)도, 개화(開化)도 아닌 ‘개벽(開闢) 국가’를 만들고자 한 적극적인 기획과 실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때가 맞지 않았다. 과연 인간의 의지만큼 중요한 것이 시운(時運)이다. 일제강점기, 미소 간 냉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 패권 다툼에 토착적·자생적 의식은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6.25 전쟁 이후 근대 정치사에서 동학의 역할은 말끔히 지워져 버렸다. 망각된 동학 정치론을 되살려야 한다. 19-20세기의 동학 정치론을 파헤쳐 면밀히 들여다보고,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동학 청년으로서의 책무일 것이다.
동학은 권리의 언어가 폭주함으로 의무와 책임을 잃어버린 사회와 국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상준을 기억한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시절, 동학의 사상을 통해 문명 개화 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1907년이었다. 을사조약을 체결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일 병합까지 이어지진 않았으나,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일본의 손에 넘어갔던 시기다. 국망의 기운이 드리우던 시기, 만 25세의 오상준은 동학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과 정치를 꿈꿨다. 서구 근대 문명에 기반한 정교 분리(政敎分離)를 한탄했다. 영성 없는 정치가 도덕을 타락시킨다고 일갈했다. 정교 합일(政敎合一), 즉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되어 도덕 문명으로 나아갈 것을 천명했다. 동학에 답이 있었다. 하늘의 마음을 담지한 사람들이 세워 나갈 하늘 문명, 하늘 정치를 상상했다. 이를 이론으로 정립하여 1907년 출간한 도서가 바로 『초등교서』다.
오상준은 『초등교서』에서 인권을 확장한 **‘천권(天權)’**을 제시하였다. 천권은 천격(天格)을 이룬 현인이 되어야만 주어지는 권리다. 그는 부단히 인격을 도야하여 천성(天性)을 발현할 것을 권고한다. 즉 천권은 서구의 천부인권처럼 초월적 신에 의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가 한울이고 만물이 ‘한울’이라는 영성적 깨달음에 도달한 자만이 천권을 부여받음을 강조한 것이다.
오상준은 “하늘을 행할 때, 개인이 문명 되고 사회가 문명 되며 국가가 문명 되고 나아가 세계가 문명 된다”고 하였다. ‘나’를 깨우치고 수련하는 것이 인민의 의무이며, ‘나’가 도를 깨우침에 따라 공동체가 변하고, 나라가 변하고, 지구 생명이 화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적 영역에 뜻을 펼치고픈 사람이 있다면 천성(天性)을 도야하여 천격을 갖춰야만 천권을 부여받고 천지공공(天人公共)의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권리에 앞서 의무와 책임의 실천이 선행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특권층을 양산하고 불평등으로 이어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울을 깨우친 이의 정치는 작금의 정치와는 완전히 달라야 할 것이다. 현재의 정치는 소인의 정치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이를 끌어안고 통합하고 통섭하는 대인의 정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상준은 정치란 ‘약육강식하는 분립의 전쟁터로부터 동귀일체의 한울타리로 화합’하는 것이라 하였다. 현재 결코 손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정치적 양극화를 공동의 비전으로 빚어내어 회통하는 도와 덕의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 한울의 정치라 하겠다. 한울을 깨친 이가 인민의 심성 수양을 돕고 천지만물을 두루 살피며 양극의 통합과 공생을 이끄는 것, 이것이 미래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하늘의 마음을 품은 자만이 하늘의 정치를 지상에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 새 정치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신중한 논의와 설계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는 화석 연료에 기반한 산업 문명의 역사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운명 공동체다. 근대 산업 문명은 화석 연료의 전면적 사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수억 년간 땅속에 잠들었던 조상의 사체를 파내어 전례 없는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욕망을 무한정 추구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절제는 미덕이 아닌 조롱이 되었다. 영성을 배격하고 이성을 치켜세웠다. 과거는 미개한 것이 되었다. 오로지 진보하는 미래만이 중요했다.
그러나 불과 200년 만에 그 업보를 잔혹하게 마주하고 있다. 2024년 미국 대선 이후 지정학적 격변은 더욱 가속될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중동 전체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대만을 둘러싼 갈등도 심상치 않다. 일촉즉발, 단 한 번의 실수가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 기후 생태 위기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닌 당면한 현실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었다. 최근 공개된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표정과 몸짓까지도 리얼하게 묘사한다. 인간의 신체도 더 이상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제 인간은 가장 지능이 높은 존재로서 자연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자가 아니다. 성장의 늪에 빠져 인류 전체가 허우적대고 있다.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식물은 금세 시들고 만다. 근본 없는 것은 그 빈약함이 탄로 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간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다시금 영성이 화두다. 영성을 체현한 인간만이 갈등을 봉합하고, 생명을 살리고, 기계와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제 성장이 아닌 성숙을 논할 때다. 이성을 앞세워 부를 쟁취하는 이기적 인간이 아닌, 영성을 깊이 품어 지구 만물을 돌보는 이타적 인간이 다른 백년, 새로운 문명의 인간상이다. 동학은 3번의 진화를 거쳤다. 동학 1.0은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 동학 2.0은 의암 손병희, 동학 3.0은 장일순과 김지하가 주도했다. 동학 1.0은 동학 창도와 동학농민혁명, 동학 2.0은 천도교 창건과 3·1혁명, 동학 3.0은 한살림운동으로 대표된다. 당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짚으며 현실을 변화하고자 적극 행동했다. 그러나 이제 한 세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학의 4번째 진화, 동학 4.0은 무엇인가? 모르겠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청년 동학은 여전히 미숙하다. 수줍다. 투박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담지하고 있다. 청년 동학이 동학 4.0의 맹아다. 이 책을 함께 집필한 동학 청년이 동학 4.0의 주역이다. 우리가 마주한 국면은 앞선 3번의 시기만큼이나 중대하다. 동학 청년은 시대적 책무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권리를 내세우기에 앞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성숙한 태도를 체화해야 한다. 노심자(勞心者)가 되자. 천성(天性)을 도야하여 천인(天人)으로 거듭나자. 동학 청년부터 실천해야 한다. 하늘 마음을 품을 때 하늘 정치, 하늘 문명이 이 땅 위에 세워질 것이다. 도리를 행하는 성인의 마음으로 나, 집안, 이웃, 나라, 지구를 살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