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밴스, 문명국가, 기술공화국

미국의 미래: 디지털-로마제국

by 소묘

21세기 들어 지구적 정치 질서는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전 지구적 보편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를 자아냈다. 특히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서구 자유주의가 인류 정치발전의 최종 목적지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는 비서구 문명권의 반응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이후 30여 년의 역사는 그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비서구 지역에서 중국, 인도, 러시아, 튀르키예, 이란 등은 각자의 전통 종교와 문명을 재발견하며, 서구적 근대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가 정체성과 거버넌스를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유교와 법가의 혼합체를 기반으로 한 국가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인도는 힌두 내셔널리즘을 중심으로 한 문명국가를 지향한다. 러시아는 정교회를 통해 유라시아 정체성을 강화했다. 이란은 이슬람 신정 체제를 고수하면서도 국제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오스만 회귀와 이슬람주의의 결합을 통해 독자적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문명국가(Civilizational State)'라는 새로운 정치적 실체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명국가는 특정 문명적 기반 위에서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받으며, 역사적 연속성과 영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놀랍게도 이러한 흐름에 미국조차도 합류하고 있다. 2024년,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MAGA 2.0'이라 불리는 체제 전환적 흐름이 본격화되었고, 정치권력을 장악한 MAGA 2.0 세력은 미국적 문명국가 실험을 가열차게 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부통령 J.D. 밴스다.


J.D. 밴스는 오하이오 출신의 정치인이자 『힐빌리의 노래』로 유명한 작가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정치적 철학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 밴스의 사상은 이성에 근거한 보수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전통주의, 영성주의, 탈자유주의적 국가 정체성의 재정립을 지향하고 있다. 밴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 패트릭 드닌의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등에서 깊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신국론』의 '하나님의 도시'와 '세속의 도시' 개념을 통해 밴스는 오늘날 미국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신학적 근거를 얻었다. 지라르의 폭력과 종교에 대한 통찰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질서 유지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데 영감을 받았다.


밴스는 전통적 가톨릭 사회사상, 즉 공동선(Common Good), 보조성(Subsidiarity), 질서정연한 자유(Ordered Liberty) 같은 원칙에 입각하여, 국가의 원리를 공동체와 신앙을 기반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 사상과 아드리안 버뮬의 '공공선 헌법주의(Common Good Constitutionalism)'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기존의 절차 중심 자유주의 헌법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밴스를 과거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적 인물로 보아서는 실상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더불어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기술공화국(Technological Republic)'이라는 새로운 정치 모델이다. 기술공화국 모델은 산업문명의 민주주의-관료주의 국가가 초래한 비효율성과 부패를 통렬히 비판한다. 디지털 신문명의 표준이 되어 갈 ‘기술 기반의 자동화 거버넌스’를 지향한다. 이 모델의 핵심 제안자가 팔란티어(Palantir)의 CEO 알렉스 카프이다. 카프는 팔란티어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인간이 수행하던 복잡하고 오류 많은 절차를 AI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대체하려 한다. 기술적 시스템 전환을 통해 보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거버넌스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카프는 '정보의 해석 권력'을 국가 운영 원리의 핵심으로 여긴다. 팔란티어의 기술은 데이터 분석 도구임과 동시에 정책 결정 그 자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인프라다. 팔란티어는 복지 지급, 이민 정책, 도시 보안, 외교 분석 등에 있어 인간의 감정이나 정치적 타협 대신, 사실 기반 예측 모델과 AI 판단이 우선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의사결정과 개입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을 구현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즉 ‘기술공화국’은 통상적으로 작동해온 민주주의 운영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려는 기술-철학적, 기술-정치적, 기술-문명적 기획인 것이다.


즉 MAGA 프로젝트는 ‘전통과 종교를 통한 정체성 회복'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 구조 개혁'까지 함께 이루려는 야심찬 구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밴스는 ‘워싱턴 정치권력’, ‘실리콘밸리 기술권력’, 그리고 ‘가톨릭 종교권력’이라는 삼중 권력의 교차점에 서 있다. 이는 과거 로마 제국의 황제가 세속권과 종교권을 함께 조율하던 모습에 근사해 가고 있다. 만일 밴스가 2028년에 치러지는 차기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후 선출된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가 밴스의 문명국가적 구상에 동참하게 된다면, 진정 '디지털-로마 제국(Digital-Rome Empire)'의 탄생을 목도할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가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상상해보자. 이미 미국은 지리적 확장과 문화적 영향력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캐나다와 그린란드에 대한 영토 확장을 언급했고, 유럽 각국의 극우 정당들과 공조하면서 '위대한 서구 문명의 재건'이라는 서사를 강화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와는 ‘X’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팔란티어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중동에도 자사의 시스템을 수출하고 있다. 또한 J.D. 밴스는 부활절 날짜에 맞춰 바티칸에 방문하여 기념 미사를 드렸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이주한 신교도들이 세운 나라 미국에서, 부활절을 맞이하여 바티칸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구교도’ 미국 정치인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또한 J.D. 밴스는 전임 교황, 신임 교황과 특별한 인연을 쌓고 있다. 4월 20일, 밴스는 부활절 미사 직후 프란치스코 교황를 접견하였다. 바로 다음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며 밴스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마지막으로 만난 정치인이 되었다. 새롭게 선출된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와의 관계 구축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5월 19일, 밴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함께 레오 14세를 알현하였다. 본격적인 회담에 앞서, 밴스는 교황께 2가지 선물을 드렸다. 하나는 Pope Leo XIV’가 새겨진 시카고 베어스 미식축구팀 유니폼이었다. 13억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가 ‘미국 시카고’ 출신이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한껏 드러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2권였다. 두 책의 제목은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과 ‘그리스도교 교의’(Christian Doctrine)다. 하나님의 교리로 신의 도시, 신의 나라, 신의 세계를 함께 건설해 나가자는 밴스의 진심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으로 전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레오 14세는 최초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출신 교황이다. 미국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상기하며, ‘신대륙’ 미국과 ‘구대륙’ 유럽을 가톨릭적 영성으로 연결 지어 “Make West Great Again!” 위대한 서구 문명을 부활시키자는 절박하고도 절절한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세간의 평가와 같이, 레오 14세는 밴스의 가장 성가신 견제자가 될 것이다. 동시에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다. 신국(神國)으로 향하는 새나라(新國)의 상징들을 하나씩 확보해 간다. 점점 서사의 꼴이 갖춰져 간다.


이 모든 행적들을 종합해볼 때, 이는 명백한 의도를 갖춘 '신문명 프로젝트'로 보인다. 고로 J.D. 밴스를 트럼프에게 간택되어 벼락출세한 신예 정치인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그는 새로운 미국, 새로운 서구 문명의 형태를 구상하는 사상가이자 기획자다. 그의 구상은 미국을 다시금 '신국(神國)'으로 만들겠다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야망과, 기술적 자동화와 제국적 확장을 통해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현대적 야망이 결합된 형태인 것이다. 만약 이 흐름이 지속된다면, 18세기 미국 독립혁명 이후 처음으로 '제2의 미국 건국'에 준하는 거대한 문명사적 대전환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의 미국은 더 이상 'USA’(United States of America)가 아니라, 'DRE(Digital-Rome Empire)'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