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산책을 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늘은 기온도 적당한대다 습도가 그리 높지 않아 꽤나 쾌적하게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손에서 놓지 못한 노트북을 덮고 밖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나홀로 걸었다. 그간 얼마나 많은 날을 홀로 걸었던가. 그 기나긴 밤의 시간들은 대개 절망과 고통으로 점철된 아픔이었다. 지난 날을 후회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자책하며, 남탓과 자학을 번갈아 가며 스스로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죽고 싶은 때도 여럿이었다. 정말로 죽음에 대해 번민했다. 나는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다시 무언가를 세워 갈 여력이 남아있는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던 심정이었던 것이다. 불과 2달 전이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시 시작할 에너지 얻고자 들어간 회사에서는, 도리어 그나마 남아 있던 기력마저 다 뺏기는 기분이었다. 사소한 것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연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날이 선 말로 온갖 불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를 회사를 위한 생산적 제언이라 여기며 위안을 삼았다. 제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결국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태도가 핵심이다. 결국 모두 내 문제였던 것이다.
퇴사 후 몸이 아팠다. 아주 아팠다. 두통과 복통으로 며칠을 고생했다. 호전을 위해 방문한 한의원의 치료도 초반에는 크게 효과가 없을 정도였다. 오 하나님,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이까. 왜 선택한 모든 일에서 최악을 경험하게 하십니까. 원망과 책망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모든 게 나의 부족함 때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다 문득 지피티에게 “지난 대화를 복기해봤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 거 같아?”라고 물었는데, 너무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을 해주었다는 한 일화가 떠올랐다. 두통약을 한 알 챙겨먹고는 챗지피티 앱을 켰다. 그리고는 물었다. “지금까지 나와 나눈 모든 대화를 종합해보았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줘.” 지피티가 내놓은 답은 놀랍게도 나를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피티의 특성상 단점보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둔 서술이라는 인상이었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냉정하고, 냉철하게 내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 비판해봐” 지피티는 냉정하고 냉철한 시각에서 비판을 하겠다며, 내가 가진 강점과 대비되는 약점과 단점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지피티는 내가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의 약점과 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피티가 서술한 내용은 전혀 아프지 하지 않았다. 즉 곧바로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냉정함이었던 것이다. 냉정과 냉철을 견지하겠다고 이야기 했지만, 실상은 온화함과 따스함이 물씬 묻어나는 톤이었던 것이다.
친구와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러자 친구는 “based on everything you know about me roast me and dont hold back 한글로 대답”라는 프롬프트를 알려주며 이를 지피티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여기서 Roast의 의미는 “집중적으로 들춰내서 날카롭게 비난하고 풍자한다”의 뉘앙스다. ‘전에 내가 했던 질문이랑 크게 다른가?’하는 조금의 의구심을 가지고 별 생각 없이 저 프롬프트를 지피티에 복사붙이기 했다. 그러자 충격적인 답변들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들어본 가장 강렬하고, 냉정하고, 냉철하고, 날카로운 비판이 폭포수처럼 밀려들어온 것이다.
지피티가 뽑아낸 모든 비판은 내가 일전에 제기했던 “냉정과 냉철에 기반한 비판”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의 치부를 그 어떤 여과 없이, 솔직하게 다 까발렸다. 내가 어떤 인간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타인에게 감추고 싶어하는지, 그로 인해 지금껏 내려온 선택에 어떤 근원적 한계가 발생했는지를 숨김 없이 밝혀낸 것이다. 할 말을 잃었다. 그 누구에게도 꺼낸 적 없는 가장 약한 모습이 강제로 드러난 기분이었다. 스스로도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아 회피해왔던 연약한 나, 지피티는 그런 나를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이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전에 겪은 고통과는 사뭇 다른 고통이었다. 나를 다시 소생시킬 계기로 작용할 고통이라는 직감이 든 것이다. 가장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가장 연약한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또 다시 외면할 것인가, 직면하고 변화의 발판으로 삼을 것인가?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똑바로 직시하고 온전하고 총체적인 진화의 결정적 순간으로 삼아보자 결심했다.
그 후로도 지피티에게 더욱 신랄한 비판을 가해달라 요구했다. 그때마다 지피티는 나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한계점에 대해 쭉쭉 늘어놓았다. 한순간도 회피하지 않고 이를 5번이고 10번이고 20번이고 읽었다. 눈을 꼭 감고 나의 감정과 깊이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자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결국 다 내 탓이다” 절망과 책망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날의 푸념과는 달랐다. 타인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변수를 탓하며 나의 책임을 회피해왔지만, 결국 내가 이런 과정과 결과를 맞이한 것은 연약함을 마주하지 않으려 끊임없이 회피해왔던 오롯한 나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그 간결하고도 별 것 없는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근 2년간을 표류해왔던 것이다.
그 한 문장이 머릿속에 스치자,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시간을 견디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감내하며 본질을 마주한 나에 대한 감사함인지, 나를 광야로 이끌고 끝이 없는 듯한 고통 속에 몰아넣으며 끝내 스스로 자각에 이르도록 해준 하늘에 대한 경외심인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살리게 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인지, 아니면 그 모두를 포괄하는 것인지.
오늘 천천히 길을 걸으며 수없이 ‘감사’를 마음 속에 되뇌였다. 근 1주간 비로소 고통의 속박에서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간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할 수 있다며 자만하며 무진장 애를 써왔다. 집착과 욕망이 모든 비극의 화근이었던 것이다. 이상을 꿈꾸되,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해야 한다는 자명한 진리를 이제서야 배운 것이다. 위대한 인물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품을 수 있는 그릇의 넓이와 깊이를 차츰차츰 늘려가는 것이다. 시야는 넓고 크게 보되, 실행은 작은 것부터 빠르게 해야 한다. 훌륭한 책을 읽고, 좋은 컨텐츠를 찾고 보고, 글을 쓴다. 그렇게 매일을 즐겁게, 치열하게, 성실하게 살다보면, 내가 닿고 싶은 목적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조금씩 늘어가지 않을까.
중심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휩쓸리기 쉽상인 세태다.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을 따라가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성찰하자.
변화의 씨앗은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지금껏 그걸 믿지 못했을 뿐이다.